요한복음14장1-11절

~「여러분들은 마음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신을 믿고,또 나를 믿으세요. 나의 아버지 집에는, 주거가 많이 있습니다. 만약 없으면, 여러분들에게 말해 두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나는 장소를 대비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여러분들에게 장소를 갖추면,또 오고, 여러분들을 나의 밑으로 맞이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들도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는 길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습니다. 」 토마스는 예수에게 말했다. 「주인이에요. 어디에 오시는 것인가, 우리들에게는 모르겠습니다. 왜, 그 길이 우리들에게 압시다. 」 예수는 그에게 일컬어졌다. 「내가 길이며, 진리이며, 목숨입니다. 나를 통해서가 아니면, 누구 혼자 아버지만 바탕으로 올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만약 나를 알고 있었다면,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어,또,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 【피리포】는 예수에게 말했다. 「주인이에요.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 그렇게 하면 충족합니다. 」 예수는 그에게 일컬어졌다. 「【피리포】. 이렇게 오랫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데, 당신은 나를 몰랐습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아버지가 나에게 계시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말은, 내가 자신에게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가운데에 계시는 아버지가, 자신의 기량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아버지가 나에게 계시면 나가 말하는 것을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기량에 의해 믿으세요. ~

예수님이 빠져나와져서, 정말로 이제부터, 자신이 중요한 유언을 제자들 앞에서 남기고 여겨지고, 예의 격동을 느꼈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의 영령을 떠는 정도, 이제부터 제자들에게, 중요한 유언을 이야기되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유다만 나간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이야기된다라고 하는 요한의 복음서독특의, 중요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입니다만, 그것을 시작하기 앞에 예수님이 지금, 빠져나와진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때, 아직 제자들은 제일다툼을 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다툼을 하고, 아직 자신의 공훈이나 자신의 욕심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는 제자들의 빠져나온 것이, 예수님에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중요한 유언을 하는데, 장해가 된 장벽이 되고 있는 마음의 문제를 하나, 정말로 없애기 위해서는 제자의 빠져나오고,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그 장해를 없애는 것이 하나. 또 하나는 배신자를 이 장소에서 추방하는 것이, 예수님이 유언을 행해지기 전에, 절대로 이 장해를 둘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탐욕, 아직 아무 것도 깨다를 수 없는 제자들. 빠져나온 것으로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고 있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 하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그 사람을 유언 앞에 여기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것을 지금 예수님은 빠져나온 하나의 작업은 마칠 수 있어서,그리고, 다음에 배신자를 예수님이 여기에서 쫓아 버리는 것을 말씀을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과 말씀을 하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으로, 드디어 정말로 제자들을 향해서 유언을 남겨진다. 그 제자들을 향해서 유언을 남겨지는 것이, 요전 메시지 밑 곳에서 서문이 시작되고,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자신이 떠나 가므로 제자들에게 남김없이 유언을 남기고 여겨지고, 긴 설교가 시작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여러분들은 마음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신을 믿고,또 나를 믿지 않음 있어」 예수님이 나의 마음이 술렁거리고 있다고 표현되는 것이, 요한 복음서에서는 3회 나옵니다. 그것은, 한번은 【라자로】를 되살아나게 할 때에 【라자로】를 향하고 있기가 아니고, 죽음이라고 하는 권위를 향하고,그리고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을 향하고, 「【라자로】よ 나와라」라고 직면했을 때, 예수님은 격렬하게 마음이 동요되고 있다. 이라고 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 위에, 【이스카리오테】·유다만 배신하려고,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배반하는 정성을 쏟고, 그 때 예수님이 이야기될 때도, 「나의 마음은 술렁거리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것으로, 예수님이 마음을 시끄럽게 하고 있을 때가 몇 시인가, 당연 인간에 대하여가 아닙니다.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 혹은 죄를 담당하고 있는 죽음, 이 죽음의 권위를 향해서 직면하고, 싸워질 때에 예수님은, 마음을 격렬하게 움직여졌다. 떠들어대졌다고 말하는 표현을 요한이 하고 있는 곳을 보면, 「여러분들은 마음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먼저 최초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술렁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안(속)에서 배반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여러분들은 내가 가는 곳에 지금 올 수는 없다」 모두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들은, 우리들은 당신 때문에 집도 버리고, 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당신을 따랐는데도, 당신은 무엇을 보답해 주시겠습니까? 이라고 듣고,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모두를 걸어서 따랐는데도, 「아니, 이제, 당신은, 나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해지고 있고, 더욱 목숨을 걸어서 저는 당신을 따릅니다. 과 베드로가 말했을 때에도, 「아니요. 당신은, 지금은 나가 있는 곳에 올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제, 떠나 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닭이 2도 울기 앞에 3회도 나를 배신하고, 3회도 나를 저주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지금 예수님에게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배신자가 있다라고 말해져, 이제 예수님이 가는 곳에 갈 수 없다라고 말해져, 이제 나를 볼 일은 없는,라고 말해져, 당연 그들의 마음은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동요하고, 불안으로 가득해서 오히려 공포까지 있는 정도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최후의 유언을 남겨질 때, 제자들에게 「아니요. 여러분들은, 그런 식이게 동요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마음을 시끄럽게 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씀 지금 한다. 「신을 믿고,또, 나를 믿으세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내가 싸우는 것입니다. 마음 시끄럽게 하고 있는 것은,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을 향해서이며, 죽음의 권위에 만나고, 죄를 때려 부수기 위해서이며, 지금 나는, 그 것에 싸우고, 도전하고,그리고 반드시 나는 승리하므로, 여러분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음을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 나를 믿고, 신을 믿지 않음 있어」 이 싸움은 예수님 대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 예수님 대죽음의 권위와의 살랑거려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격렬하게 마음 떠들어지고 있어도, 인간이 마음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살랑거렸기 때문에. 나는 승리하기 때문에. 나를 믿고, 여러분들은 마음을 동요시켜서는 안된다. 나측에 달라붙으면 좋고,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이 멸망시켜지므로, 반드시 나측에 달라붙고 있으세요. 따르고 있으세요.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마음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주거가 많이 있습니다. 만약 없으면, 여러분들에게 말해 두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나는 장소를 대비에 가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의 집에 가면, 주거가 많이 있습니다. 도仰데루코코데하、色은나意見가앗테、天國니쯔이테語라레테이테、住마이가澤山아루토이우事하、死은다後니色은나段階가앗테、소코데一遍니天國니入레나이노데、色은나部屋가앗테、色은나所데敎育오受게、소노人노信仰노레베루니合와세테敎育오受게타後니天國니入룬다토이우解釋모아리、或하天國니하소노信仰生活노信仰야、生기테이루間니이에스樣니從다度合이니오이테、家가違우노다토言우人모이테、다카라、오屋敷노요나家니住무者모이레바、普通노家모아레바、小사이家니住무者모이레바、大기나家니住무者모아루。이라고 하는 것 같은 해석이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나는 하늘의 아버지 집에서, 여러분들의 주거를 대비에 가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해석으로 좋은 것인가?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여러분들에게 장소를 갖추면,또 오고, 여러분들을 나의 밑으로 맞이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들도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는 길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습니다. 」 ∼

이 하늘의 아버지 집 주거를 준비하러, 나는 일단 여러분들에게서 떨어집니다. 일단 여러분들에게서 떠납니다. 그러나 준비한 후에,또, 여러분들을 맞이합니다. 과 말씀을 한 후에, 여러분들은 내가 가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에, 토마스는 예수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중요한 설명을 할 때에, 반드시 제자들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반드시 예수님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해가 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설명해 간다고 말하는 것이,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만, 여기에서도 또, 토마스와 이제 한사람은 【피리포】가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그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이라고 하는 형을 이 요한의 복음서는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토마스가,

∼ 「주인이에요. 어디에 오시는 것인가, 우리들에게는 모르겠습니다. 왜, 그 길이 우리들에게 압시다. 」 ∼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모르겠는데요, 예수님은 도대체(일체)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당신에 붙어 간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혼자 떠나고, 어디에 가시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는 길이 완전히 모르겠습니다. 」이라고 제자가 질문하고 있는 곳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 「내가 길이며, 진리이며, 목숨입니다. 나를 통해서가 아니면, 누구 혼자 아버지만 바탕으로 올 것은 없습니다. ∼

여기로 유명한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목숨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예수님이 이야기되는 것입니다만, 지금, 토마스는, 「당신이 가는 장소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하늘의 아버지 원래에 가고, 천국에 가서 우리들의 주거를 준비해서 1도 더 돌아간다고 말하지만, 우리들에게서 떠나 가서, 가시는 길을 모른다. 왜 우리들은 뒤에서 그 길을 신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도 있어지지 않는,그리고 길도 모르는데. 」라고 말하면, 예수님은 「내가 길이다」라고 말한 뒤로 「나는 목숨으로 진리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다』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진리와 목숨은 골입니다. 진리와 길에 도달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에요?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신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들의 골이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길 순서를 모릅니다. 과 토마스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 순서를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가는 것입니까? 과 토마스가 묻고 있어서, 예수님은 그 의문에 대답하고, 『내가 길だ』 『내가 목숨으로, 내가 진리だ』이외에 대답 등 없으면 말씀 지금 한다. 그 길 순서를 모른다고 제자가 묻고 있는 것에도 관계 없이, 길 순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내가 길이다』이기 때문에, 골까지 와라고 말해지고 있게 제자에게는 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길,이라고 하는 의미가 뭐니인가? 신호를 오른쪽에 가서 왼쪽에 가고,그리고 교차점을 또 오른쪽에 가서고 하는 길 순서가 아니고, 예수님은 『내가 길 바로 그것이다』와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인생에도 비유해서 이야기되는 길에서, 그리스도교가 세워 드릴 수 있었을 때에, 그리스도교들을 이 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들. 그리고, 파울로가 【다마스코】에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 만날 때도, 그리스도교, 그리스도(Christ)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마스코】까지 가려고 했을 때에, 파울로 자신도, 「이 길에 가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마스코】에 나갔다. 」이라고 표현하고 있게, 그리스도(Christ)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 바로 그것을 『이 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트 교도들은, 그리스도교를 『이 길』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고 계시는 『이 길』과는 도대체(일체) 무엇인가? 이라고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이러한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예수님이 오른쪽인, 왼쪽이라고 배우지 않았다고 한들, 예수님이 함께에게 가 주신다면, 더 안전하지 않은 것인가? 」이라고, 이 장소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오른쪽인, 왼쪽인,그리고 교차점을 왼쪽으로 갈 수 있고,그리고 저 가두를 구부러지세요라고 말해져서, 우리들은 안심해 갈 수 있는 것일까? 반드시 또 길을 잃고,또 우리들은 틀리는 것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만일 길을 물었을 때, 가르쳐 주는 사람이, 「그럼, 나도 함께에 가 드립시다」라고 말해 준 분이 있다면, 얼마나 안심인 것인가? 결국 예수님은 골은 가르쳐 주지 않고 있습니다. 골이 아니고, 『내가 길이다』와만, 말씀을 하고 있다. 여기는, 정말 그렇게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편은 아닙니다만, 『나는 문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인,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의 원래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잠시의 사이, 당신에게서 떠나고,그리고 『내가 길』이므로, 길을 정하고,또 되돌아 온다. 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설되어질 때는, 제자에게서 일단 벗어납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 제자들의 눈으로부터는, 이제 보이지 않아집니다. 그러나, 즉시 성령님이 오고,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칠 것이다. 이라고 하는 설명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약 나를 알고 있었다면,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어,또,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 ∼

이라고 하면, 【피리포】가 또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하고, ∼ 「주인이에요.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 그렇게 하면 충족합니다. 」 ∼

하늘의 신을 보여 주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믿을 수 있고, 마음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평안해서 안정될 것입니다. 과 【피리포】는 예수님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당연 그리스에서는 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정의가 있습니다. 만일 「신을 보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이라고 하는 바람한 생각으로, 유대교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고, 유대교에 있어서도 신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신을 보았다면, 사람은 살아 있을 수는 없다. 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도 그렇다이어서, 신을 볼 수는 없는 것은 구약 성서에도 씌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라고 【피리포】가 질문하고 있는 것은, 실제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모세가 한 것 같은 대기적입니다. 위대한, 홍해(紅海)를 나누거나, 바위에서 물을 내거나, 그러한 하늘의 아버지에게밖에 할 수 없는, 위대한 기적적인 것을 눈으로 보여 주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믿습니다. 과 【피리포】가 말했을 때에, 예수님은, 정말로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성서적으로도, 그리스의 철학에 있어서도, 유대교에 있어서도, 생각될 수 없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사람에게는 비상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나를 보세요. 나를 보면, 하늘의 아버지를 보고, 신을 본 것과 같습니다. 나를 보면, 신을 본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 그것은 이제, 이 시대의 사람에 있어서는, 얼마나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놀람이었던 것인가? 그리스 철학에도 유대교에도 없다. 신을 볼 수는 없다. 사람이 신을 보면, 살 수는 없다. 이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나를 보면, 이제, 신을 보았습니다」라고 예수님이 여기에서, 대담하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리포】를 향하고,

∼ 「【피리포】. 이렇게 오랫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데, 당신은 나를 몰랐습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아버지가 나에게 계시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말은, 내가 자신에게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가운데에 계시는 아버지가, 자신의 기량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신 안(속)에 하늘의 아버지가 있고,그리고 하늘의 아버지 안(속)에 내가 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과 말씀을 하고, 「내가 아버지에게 접고, 아버지가 나에게 계신다고 하는 것을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업을 보아서 믿으세요」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당연 최후의 만찬의 뒤에, 십자가에 가설할 수 있어서 죽어졌을 때에는, 제자에게서 모습이 보이지 않아집니다. 그리고 승천하고, 부활한 후도, 결국 하늘에 가셔버리므로, 제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떨어져 갑니다. 이제부터, 이제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제자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지금 현대의 우리들은 볼 수 없습니다. 하늘의 좌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직접 예수님을 우러러보는 것은 재임에서밖에 없습니다. 재임의 때 이외, 우리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움직이지 않고 하늘의 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된 후,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말씀을 한 것은,또 나는, 즉시 여러분들을 맞아들입니다. 과 말씀을 한 것은, 성령을 여러분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또 나를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세요. 이라고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단 저는 보이지 않아져, 일단 여러분들에게서 떠나 갑니다. 그러나, 나는 한번 더 오고, 여러분들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당연, 모든 이 세상이, 지구상이 끝나고, 예수님이 재임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예수님은 재임되는,이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을 한 것입니다. 「나는, 한번 더 온다」 그 때는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눈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과 같이. 그리고 그 때에 여러분들을 하늘의 아버지 원래에 데리고 갑니다. 당연 이것은 우리들이 재임으로 올라서 천국에 간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세대의 제자들은 당연, 축복이며, 약속으로, 정말로 경사스러운, 구전된 것입니다. 주인은 한번 더 오시다고는, 제자들이 쭉 주인은 재임된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이 말은 같습니다. 그러나, 빗나가 것 뿐만 아닙니다. 우리들의 인생으로 죽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들 믿은 사람은, 반드시 죽었을 때, 예수님과 한번 더 만납니다. 재임이 아니어도, 아직 재임이 와 있지 않아도, 한번 더 예수님은 마중 나와 주시겠습니다. 죽은 우리들의 영혼을 천국에 무사, 하늘의 아버지 원래에 무사하게 데리고 가 준다. 임종의 때도, 예수님은 마중 나와 준다. 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에 있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묵은 약속의 유대인, 유대교에 있어서도, 죽은 뒤(후)의 영혼이 천국행 먹어서 말하는 것은 배워 믿고 있었습니다. 신을 믿고, 정확하게 신을 따르고, 바르게 산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고, 신에게 거역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고, 방황하는 것이다. 황천에 가는 것이다. 이라고 하는 정의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유대인이 믿고 있었던 것 같이, 천국행 자리수의인가? 정말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가고 말하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르다」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가 아니면, 아무도 하늘의 아버지 원래에 갈 수 없다. 내가 하늘의 아버지 집에서, 장소를 대비에 간다. 과 여기에서, 천국이 그 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이해의 방법에서는 안된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가설되어서 죽어서 되살아나지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을 보아서 들어갈 수는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유대인들이 말해지고 있었던 율법을 지키고, 신을 믿고, 정확하게 따르고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 이전에,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인간 등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누구나 묵은 약속의 사람이어라, 지금의 시대 사람이어라, 사도들이어라, 예외없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천국에서 집을, 우리들이 사는 장소를, 대비에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후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우주의 어딘가의, 우주의 끝 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당연 그것도 포함되어 있고, 당연 그것은 약속입니다. 주인이 재임되는 것도 약속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고향에 들어가는 것도 약속. 이것은 틀림 없이, 완전한 약속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한번 더 여러분들을 맞이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나를 한번 더 보아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단지 재임의 때, 단지 죽었을 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천국만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주의 끝 어딘가인가? 죽은 뒤(후)의 이레? 이라고 하는 문제가 되면, 그것은 틀립니다. 천국에서 사는 장소를 대비에 간다. 조형에 간다. 이라고 하는 말은, 더 우리들이 가까워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죽어서 길을 갖추지 않으면, 그 천국의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그리고 그것을 믿을 수 없으면, 아무도 천국에는, 묵은 약속의 사람도, 아담으로마저, 다비드로마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를 통하지 않으면 무리입니다. 누구 한 사람,입니다. 예외없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죽고, 천국의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믿은 사람이, 성령으로서 우리들이 있는 곳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들의 안에 들어와졌을 때에, 예수님이 천국을 갖추어 간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신앙을 가지고 강화들 얻고, 성 있어 생활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도 좋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갖출 수 있는, 그러한, 우리들을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기독자로서 키워 가는, 만들어 내는, 이것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갖추고 있 지 않니는 것인가? 이라고 말하는 오늘 본문이 정말인 해석입니다.

죽어서 천국행 먹어서 말할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재임해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우리들의 보답 집이 있는,이라고 하는 것이라도 아니고, 서서히 우리들이 천국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므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진실의 하늘의 나라, 진실의 내가, 당신을 맞아들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진실의 의미는 뭐니인가? 우리들은 성째들 れて, 예수님을 신뢰하고,그리고 예수님과 닮은 사람을 하게되지 않고 있으면, 예수님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들의 안에 오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예수님과 사는 것에 어울린 기독자로 되게 하는, 어울리게 만들어 내지 않으면, 성령에 의해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 않고 있으면, 성령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걷는, 그 기독자가 되지 않고 있으면, 아무도 하늘의 아버지 원래에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신과 화해를 할 수 없다. 아무도신을 「【아바】, 아버지. 」이라고 부를 수 없다. 아무도신의 아이와 떨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의미는, 아득히 재임의 날이라든가, 우리들이 죽은 끝(앞)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정돈할 수 없으면,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이라고 하는 이야기합니다. 더럽혀진 그대로, 죄를 가진 그대로,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나를 믿으세요. 그리고 신을 믿으세요. 그리고, 그 업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몇 번이나 믿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사는 장소를 갖추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한 것 같이, 예수님은 『진리이며, 목숨이며, 길이다』라고 말씀 지금 한다. 예수님은, 인생의 골적인, 재임이라든가, 죽은 후라든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우리들을 갖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에 어울려지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에 어울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임종의 때, 혹은 재임의 때, 정말로 예수님과 하나에 모아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갖춘, 기독자들이 하나에 모이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아버지를 숭배하도록되는 것입니다. 단지 단지,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는 종말적인 이야기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나야말로, 길 바로 그것. 골 바로 그것. 진리 바로 그것. 목숨 바로 그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것에 의해, 예수님을 믿는 것에 의해, 예수님이 제 안에 들어오는 것에 의해, 우리들은, 진리의 예수님을, 길의 예수님을, 목숨의 예수님을, 안에 내受 되어, 믿어서 구제되어서, 함께 있는 것이 길입니다. 길 바로 그것입니다. 어디에 갈 것인가? 내일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최종적으로는 천국에 가고, 천국에는 여러 집이 있다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만나지 않으면 무리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지 않으면, 무리이다. 당신이 내일 어디 갈지등, 예수님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일 무엇이 일어날지도,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우だ왼쪽조차 말하는 바람에, 교차점을 어디를 구부러지면 하고 하는 바람에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나 바로 그것이 길, 나 바로 그것이 목숨, 나 바로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한, 나를 믿는 한, 이제 당신에게는, 내가 내受 해서 길이 되고 있다. 함께 있어 주신다. 함께 걸어 주신다. 함께 한 켤례, 한 켤례, 함께 걸어 준다. 이것이 길이라고 하는 의미로, 골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와는 내일 무엇이 일어난다든가, 보답하고, 살아 있는 사이에 저것도 원하는, 이것도 원하는, 그럼 없습니다. 제가 내일 뭔가가 되고 싶은,이라든가가 아니고. 내일 저는 어디어디 가고 싶은 그러나 내지. 저는 내일 어떤 힘이나 지혜를 원하는,이라든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내가 길이다. 내가 목숨으로,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이제부터 당신이 무엇이든 모두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내일 뭔가 하고 싶다든가, 바람이라든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믿고, 내가 모두 걸으면, 그것이 이제 길에서, 이제 그것이 진리로, 이제 그것이 목숨이다. 죽고 나서가 아니면, 그 것을 지금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내일 뭔가를 하고, 이러한 삶의 태도를 하는 것이 길이네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리에요? 우리들이 이러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이에요? 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믿은 그자체가 진리. 그자체가, 이제 길. 그자체가 목숨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삶의 태도를 했기 때문에 진리. 제가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예배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로 신의 영광이네요? 신의 나라이네요? 이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들은 신의 영광이다든가, 예수님을 극구 칭찬한다고 입으로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걷고, 어떠한 삶의 태도를 하고,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기도, 어떻게 공부할까라고 생각합니다. 그 것을 진리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 아득히 틀림입니다. 하나도 이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진리따위 불러서 내지, 그런 것을 예수님은 길에서, 목숨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진리. 당신이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영원한 목숨. 당신이 지금 나와 함께 걷는 것이 길입니다. 당신이 뭔가 하고 싶어서,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어서, 정당한 크리스천의 길을 걷고, 정확하게 선인으로, 사람에게 상냥하고, 이웃사랑에 넘치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당신의 뭔가는 진리라도 아무 것도 아니고, 당신이 얼마나 우수라도 길이 아니고. 당신이 얼마나의 성장을 이뤘다고, 거기는 목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완전히 전혀 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바로 그것. 예수님 바로 그것입니다. 목숨이며, 길이며, 진리. 그리고 이분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아무도 구제되지 않는다. 아무도신의 아이는 친숙해지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정말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암기하고, 암송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목숨입니다, 길입니다. 과 간단히 말할 수 있어도, 확신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의 뭔가는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 바로 그것이 길, 목숨,그리고 진리. 이분을 떨어져서는 아무도 진리를 모른다. 아무도 길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목숨이 없습니다. 이분을 떨어지고 있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분을 믿지 않으면, 우리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열심과 욕망은, 하나도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예수님의 향기가 떠다니지 않는다. 아무 것도 예수님의 힘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일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수 바로 그것이 함께 있지 않은, 예수 바로 그것이 제 안(속)에 없다면, 이제 거기에는 목숨이 없습니다. 어떤 신앙이 있을 것이라고, 어떤 열심이 있을 것이라고, 어떤 기도가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 바로 그것만이, 진리로 목숨으로 길입니다. 이분에게서 정말로 벗어났을 때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분과 함께 걷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찬미 안에는,그리고 많은 선교에 나간 순교자들이,그리고 많은 마지막으로 정말로 주로 충실하게 시중든 크리스천들은, 「전번의 미래를 보지 않아도 좋은, 단지 한 켤례 한 켤례 주인과 함께 걷는다. 」이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전번의 미래는 모릅니다. 그들은 언제나 박해에 맞고, 내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목숨이 어떤 것인가? 내일등 희망이 가질 수 없고,그리고 선교 땅에서 병이 나고, 선교 땅에서 가족이 죽고, 선교 땅에서 자신의 동료 같은 크리스천들이 점점 죽어 가는, 더구나, 요한이 이 성서를 1세기말에 썼을 때에, 주인은 재임되어 오지 않고,그리고 많은 크리스천은 순교하고, 제자들 안(속)에서는 이제 요한밖에 살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재임만을 말하고, 요한은 죽은 후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릅니다. 예수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예수 바로 그것의 목숨, 예수 바로 그것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바로 그것이 진리이며, 목숨이며, 길. 이분과 함께 없으면, 우리들은 이 말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이 본문을 정말로 오해하고, 암송하고, 암기하고, 단지 말뿐이어서 말한다면 틀림입니다. 진리를 굽히고, 섞어 물건을 넣고, 내 멋대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신을 아는 것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크리스천에 있어서 성서를 정확하게 배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만 말만이, 이 세상의 유혹과, 악마의 공격으로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제멋대로 한 해석은 우상예배가 됩니다. 주인이에요, 주인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로 기억할 수 있었던 사람이 구제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참된 양치기, 자신이 정말인 주되는 목소리를 듣고 구별합니다. 신을 따르는 것이 인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지성입니다. 신만이 모두를 아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Jesus Christ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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