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16절-21절

~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이전의 요한복음 6장에서 오천 명에게 빵과 물고기를 준 기적 후,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고 한번 더 이 기적을 체험하자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가서 우리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혹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되어 달라고 모두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고, 제자들만 먼저 가버나움쪽에 배를 저어 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하시려는 의도로 오천 명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육체적인 욕망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만, 공복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군중의 일치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재촉하여, 군중을 돌려 보내신 뒤에 기도하시려 산으로 올라 가시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도 아직 이해하지 않고 지금 자기들만 가버나움에 배를 젓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될 것 같아서, 또 빵을 달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시는 것도 모두로 부터 떠나간 이유도 모세처럼 한 예언자로 여겨지는 것 같아서 싫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40년간 이스라엘의 백성은 만나로 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더 이 만나를 먹을수 있도록 해달라고 민중은 부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모세처럼 한 예언자라면 한번 더 만나를 내리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동등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의 빵은 먹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나의 빵은 생명의 빵이다.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며,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아니라는 구별을 하시고 싶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한 것은 나다.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에서 홍해(紅海)를 나누고, 바다를 건너가게 한 이 기적도 내가 했다, 이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을 보지 않고 모세처럼 예언자의 한명인 것 처럼 취급을 당한 예수님이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단지 물러나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셨는가 ? 나는 모세보다 먼저 있었고, 모세보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4~ 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노를 젓고 있습니다. 폭풍이 거세졌습니다. 이 갈릴리호수는, 동서로는 11 킬로미터 이고 남북으로는 20 킬로미터라는 타원형의 호수입니다. 가장 짧고 가까운 곳에 간다해도 11킬로미터라고 한다면 아직 반정도밖에 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낮경 출발해서 밤중이라고 한다면 4~ 5킬로미터 가는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곱과 요한은 어부입니다. 보트 젓기의 명인입니다. 바람을 볼줄 알고 물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고 익숙되여 있는 선원으로서는 프로중의 프로입니다. 그 프로가 폭풍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이제 야밤중이 되었는데도 단 4~ 5킬로미터 밖에 앞으로 가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의 폭풍이 거셌는지 알수있습니다. 그 폭풍 속에서 혼자 떠나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고 계시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 마태서나 마가서 등..에서는 기적적인 것으로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고 예수님께 정말 주님이시라면 나에게도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해달라고 베드로가 묻는, 물위를 걷는 기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의 강조가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물위를 걸어 온 예수님의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세 위에 계시는 분, 모세보다 먼저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오시면 모두가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 무서워하고 있는 사이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오시고, 모두가 많이 놀라면서 아우성치기 때문에 "나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 마가복음서, 마태복음서에서는 물결이 가라앉았을 때에 역시 이 분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이 표현이 없습니다. 제자들 쪽이 아니라 예수님쪽에서 하나님을 어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쪽에서, 역시 하나님이었던가와 같은 말을 하는데 요한의 복음서만은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쪽이 나다. 라는 어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모세와 같은 인간의 하나가 아니다. 내가 모세를 바다 안에 걷게 한 자라는 것을 요한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태서와 마가서는 AD40-50년에 씌어져 있습니다만 요한의 복음서는 AD100년정도에 씌어져 있습니다. 요한의 말년에 씌어진 것입니다. 밧모스 섬으로 나간 후에, 씌어진 책입니다. 요한의 경우는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가 왜 지상에 오셔서,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인가?. 잘 이해한 후에 이 복음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적인 것은 요한에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고 여기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가 중요합니다. 바다 위를 걷고 있을 때에, 모두가 무서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라고 놀라는 것이 아니고 나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어필이 먼저 와 있는 것입니다. 왜? 나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는 "나는 에고 에이미 이다"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에고는 에고이스트(egoist)입니다. 에고이스트(egoist)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모세가 아닌,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도 아닌, 에고이스트(egoist)적인 나는 그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나다. 에고를 나타낸 뒤에, 에이미는 "∼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있다" 고 할때의 있는 자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I AM 예수다 라고 하는 자기 소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랍어에서 에고 에이미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에고 에이미는 어디에서 표현되고 있을 것인가 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스스로 있는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셨다'고 말하여라 "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나는 있다고 하는 자다 " 라고 하는 희랍어 성경에서는 에고 에이미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저 호수 위에서 말한 "나 다" 는 여기서 말하는 나다 입니다. 그럼 이 때 모세와 하나님이 어떠한 대화가 있었는가 하면,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파라오에 가라고 말씀했을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그들에게 "너희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했을때,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에고 에이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 라고 하셨고 이 때의 나를,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려 온 자. 하늘에서 내려와 온 자. 이것을 히브리(Hebrew)어로 "야훼"라고 말합니다. 이 "야훼"는 일본어에서는 "주" 입니다. 하나님은 에로 힘. 그러나 이 "야훼"는 에로 힘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속죄의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에게 나타난, 에로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 오신 하나님. 속죄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 무엇을 속죄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고 있는, 400년이나 노예로 괴로워한 이스라엘의 백성을 속죄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특별히 내려 오셔서, 하나님의 일부분을 보여주시는 것은, 이 '야훼' 입니다.

이 '야훼'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나 다" , 있는 자, 나는 "야훼" 라는 말입니다. 원문의 희랍어 성경를 읽으면 표현이 구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은 구별되고 있습니다. "나 다", 라고 말할 때도 구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어로 읽으면 모두 나다. 전부 다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구별이 되지 않지만 유대인은 히브리(Hebrew)어로 구별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Hebrew)인에 있어서 구약은 하나님은 '야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속죄하는 자입니다. 어디에서? 이집트에서. 그것을 제사 지내고 있는 것이 넘어지나는 축제입니다.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하는 하나님. 이것이 '야훼'인 것을, 내려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있는 자. 이것은 무엇입니까? "나 다" 입니다.

이 "나 다" 에 어느 정도 큰 의미가 있을지는 유대인만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나다. 라고 할때, 깊이 이해합니다. 우리 일본어에서는 이것을 잘 구별해서 이해가 가지 않지만 히브리(Hebrew)어는 완전히 구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야훼' 이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혼자다. 여기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려 오신 분. 하나님에게서 내려 온 복수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여기서도 구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모세의 때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기본입니다. 삼위일체로 내려 온 하나님, 그리스도(Christ). 그리고 십자가로 구원해주신 예수님. 이것을 구별하고 예수님은 이 때로부터 "나 다" 라고 히브리(Hebrew)인에게 이야기 하고 바다 위에서 "나 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려 온 자. 속죄하기 시작하기 위해서 온 자. 나는 "야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라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각위을 보고 특별할 때만 내려 오는, 특별할 때만 계약하는 하나님, 인간에게 특별한, 큰 행사를 일으킬 때만큼 내려 오는, 하늘에 쭉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려오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려 오는 하나님은 지금 호수 위에서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야훼"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는 여기를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25절 "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여기도 희랍어에서 에고 에이미, 에고 에이미라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히브리(Hebrew)어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말합니다. 나야말로 에고이스트(egoist), 나 자신이 당신의 허물(죄)를 지우는 자. 히브리(Hebrew)어에서는 이렇습니다. 나의 명예를 위해서, 나의 영광 위해서, 나의 이름 위해서 나의 힘 때문에 나는 너의 허물(죄)를 지우는 하나님이다. 이 이사야는 '나다' 를 표현할 때, 에고 에이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나이외,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나다. 단 혼자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나.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동등인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나. 그리고 그 사람만이 속죄하고, 죄를 지우는 자.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온, '야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시는 주님을 표현하는 주 입니다. 이것이 히브리(Hebrew)인에 있어서 보통이상으로 구별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입니다. 얼마나 '야훼' 가 '나다' 라고 하는 이름이 위대하고 인간에 있어서 은혜인지를 요한은 지금 그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마태서나 마가서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단순한 기적만이었을지 모르지만, 요한에 있어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 온, 유대인이 대망하고 있었던, 주되는 분이라는 것을 요한의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야훼' 속죄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이외에는 완전히 스스로 있는 하나님. 이것을 예수님이 제자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않고 오천 명을 먹이신 그 기적밖에 생각 않하고,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해못하는 빌립도 안드레도 그리고 이렇게 이해 못하는 제자 앞에 예수님이 걸어 오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세가 아니고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엘리야가 아니다.

그들을 보낸, 그들을 움직인, 그들을 바다의 밑바닥을 걷게 한, '그가 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구약에서 그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이 나다. 요한복음서 1장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심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계셨다. 이것을 얼마나 요한은 호소하고 싶었던가? 얼마나, 무엇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는지를 호소하고 얼마나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인가를 호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전세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독교의 복음중의 복음, 교리중의 교리, 진리중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비밀입니다. 이 이름이 힘으로, 이 이름이, 우리들이 사는 모든 희망입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특별한 이름입니다. 유대인에 있어서 이 '야훼'는 굉장한 특별한 이름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구별이 없는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이 이름은 또 하나 요한복음서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8장 1-6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배반한 제자 가룟 유다는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대를 데리고 모여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라고 듣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 하셨습니다. 이것도 에고 에이미입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범인, 예수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또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온 자. 속죄하는 사람. 특별히 계약하기 위해서, 내려 온 자. 스스로 존재하는, 있는 자가 나다. 이것을 말한 순간, 인간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전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얼마나 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다라고 말했을 때, 전원이 기절해 무너져, 숨마저 끊일정도로 어느 정도의 힘입니까?

예수님이 나다고 말한 순간, 모두 무너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I AM 이라고 말한 것 뿐만 아니라, 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야훼" 이다. 구세주다. 나는 구하기 위해서 온 나는 당신과 계약하기 위해서 온, 있는 자다, 여기에서 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수 위에서 말한 에고 에이미,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에고 에이미, 이사야로 말하고 있는 에고 에이미, 모세에게 이야기되어서, 있는 사람 에고 에이미. 여기서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는 다른, 다른 예언서와도 다른, 다른 하나님들과도 다른, 이 나.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고, 영원한 존재, 창조 주인,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 내려와 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식이며,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 나다. 에고 에이미, 야훼가 배 에 붙은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결이 곧 멈추고, 11킬로미터의 폭을, 4~ 5킬로미터 만 왔지만, 뒤에 4~ 5킬로미터를, 겨우 몇 분 안에 바라는 항구에 가버린 것입니다. '야훼'를 실은 순간입니다. 이것은 시편에 씌어져 있습니다. 시편 107편 29, 30절 " 주인이 폭풍을 가라앉히면, 물결은 잔잔해졌다. 물결이 잔잔해졌으므로 그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을 그 바라는 항구에 이끌어졌다."

이 주님은 에고 에이미입니다.야훼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바라는 항구에 데리고 가는것입니다. 그리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어떤 괴로움도 어떤 슬픔도 어떤 상황도 '야훼'의 하나님이 모두에게 있으면 그것은 이제 문제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 하나님이 강렬한 이름, 예수님이 설교하고 있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당신은 모세보다 그렇게 젊은데 모세보다 먼저 태어났습니까? 라고 말하고 모세보다 먼저 태어났느냐고 그들에게 대답하면 모두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돌로 죽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유대인은 화가 치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도 에고 에이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라고 말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일은 없었습니다. 예언자다, 혼자다,라고 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있어서 "야훼" 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그 특별한 이름을 예수님이, "나 다" 고 말했기 때문에 유대인이 돌을 손에 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이 "나 다"가 얼마나 힘이 있을지 라도 유대인에 있어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혼자, 그것을 인간이 한다는 말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있어서 이 야훼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똑같이 이야기 해서는 안되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인도한 하나님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만은 이 에고 에이미를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만은 이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요한만은 예수님께서 내려 왔다, 그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처음부터 계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것입니다. 내 언니가 죽었을 때 저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해뜰 무렵, 소설을 쓰고 있을 때, 제 마음에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다. 나는 여기에 있다" 정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날로부터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 때, 나에게도 에고 에이미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있는 자다. 이 요한복음서를 읽고 나도 확실하게 이해한 것입니다. "나다" 는 인간을 달래는 말이 아니고, 격려하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언니가 죽은 이유를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제가 이 상황에 빠진 이유를 가르쳐주시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찬이 되라 든가, 교회에 가라, 성경을 읽을라, 기도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말한 것은, '에고 에이미' '나다'. 나야말로 주인.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에고 에이미. 이 말이 하나님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 에고 에이미라고 말해서 내려 오는 하나님이, 나다. 라고 말한 순간에, 나에게 힘이 끓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주인만이 구세주로, 속죄해 주셔서, 하늘로부터 내려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나는 " 야훼 ". 당신을 구하는 자. 내가 그 주 다. 성경은 무엇이 씌어진 책입니까? 에고 에이미가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무엇이 쓰여져 있는 것입니까? 나는 구세주다. 내가 그리스도(Christ)다. 내가 예수다. 이것이 씌어져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다.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계속 말씀하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뭐라고 한 것입니까? 배 부르게 해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나를 내리게 하라, 병을 고쳐달라, 돈을 달라, 행복하게 해달라. 인간은 이것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이 힘 있는 이름을 깔보고, 가볍게 보고, 비웃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경솔하게 외칠 수 있는 이름도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으면, 예배 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는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이름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볍게 보고, 배가 부르게, 행복하게, 마시게하고, 입혀주고 얼마나 예수님에게 이것을 해 온 것입니까? 이 에고 에이미에게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Christ)에게 속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합시다.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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