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58-66절

~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리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 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출애굽기(The Book of Exodus)에 씌어져 있는 것 처럼 애굽에서 나온 날로부터 한 달째 되는, 두 번째 달 십 오 일에 이스라엘의 백성은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기 시작하였고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때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준 빵이다" 40년간 그들을 그 만나로 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개의 빵으로 오천명을 먹인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그 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여 달라고. 자기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껏 먹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 모든 말씀을 하시고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메시지를 계속 되풀이 하시지만 "내가 하늘에서 내려가 온 빵이다. 나를 먹지 않으면, 나를 마시지 않으면 아무도 살수 없다.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백성을 광야에서 먹인 그 만나가 아니고 목숨의 빵이며, 영원히 사는 빵이다" 라고 주님은 이 회당에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것을 들은 모든 제자들이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까 배 부르게 빵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이 제자들은 많은 병을 치료받은 사람이며, 많은 기적을 본 사람들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때는 제자가 되고 싶다, 함께 있고 싶다, 함께 데리고 가 주시고 나도 그 가르침이 알고 싶다고 예수님을 뒤따라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라고 말씀하셨을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던것입니다. 정말 이제 당신과 함께 있을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듣고 있는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 예수그리스도의 힘을 보고 나서 말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들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진리에 반론하고 싶었고 반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는데도 듣고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 문제로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것은 이 것입니다. 그들은 불평을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불평불만을 단지 말하고 불평을 늘어놓은 것 뿐인 지도 모른다. 그들에 있어서는 수군대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수군댄 것 뿐이다. 단지 변명한 것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서로 수군대지 마라. 좌절하는 것인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인들은 수군대고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에 있어서는 그것은 좌절입니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단지 넘어지고, 탁 무너진 것과는 다르다.

여기 본문의 내용에서 말하는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너졌더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있어서의 실패는, 함정에 빠진다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사냥꾼들이 새, 짐승을 잡을때 하는 말입니다. 올가미를 장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당신들은 넘어질 것인가?, 당신들은 올가미에 붙잡히는 것인가?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다 알다시피 새, 짐승이 올가미에 걸려들면 사망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뜻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한번 걸리면 절대로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식료품으로 되어 죽음을 의미하고 멸망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잡혀, 올가미에 걸리고, 이제 달아날 수 없을만큼, 멸망을 선택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듣고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고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수군대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측에서는 여기에서 "당신은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인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보면 어떻겠느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영적인 모습, 영광된 모습으로 승천하실 때,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당신들은 과연 그것을 믿을 것인가?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가 예수님이 지금부터 하시려고 하는 모든 것을 믿을 것인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은 전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성령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을 주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외에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것 "육"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육은 인간적인것이 전부 입니다. 사고방식, 생각, 감정, 마음, 정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지식이 전부 다 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이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한 말씀이외, 그리고 거기에 성령님의 활동이외, 아무런 유익도 없고, 당신에 있어서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것에 생명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나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에 따른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내 말씀외에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서 좌절한 것인가, 여기에서 올가미에 걸려들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제 붙잡히면 멸망이외 없다고 말하는 이 진리의 말씀에 당신들은 들어도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누가 믿지 않을지,또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갑자기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합니다. 배반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신 것을 예수님은 예견해 두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반한다는 것은 원본으로 말하면 배반한다고 하는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손수 전함한다 입니다. 악의가 있는 의미가 아니고 물리적으로 건네준다라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여기 이 물리적으로 건네준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다른 것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건네줬다."~

~"빌라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놓았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놓았다"~

라고 하는 곳의 "내놓는다"라는 의미도 같습니다. 여기에서와 같이, 물리적으로 건네 주었다고 하는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목숨을 육의 목숨으로 사탄에게 건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인가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반드시 말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후에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가 전지전능하시다면 반드시 제자가 배신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몰랐다면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이 나온 것입니다, 이 천년.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인간 취급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배신하고 나를 내놓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라고 여기에서 예수님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견하고 예정대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간은 이러한 불평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에 누가 거역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반론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측의 책임이 아니고 하나님측의 책임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고 또 많이 있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변명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기에서 예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

여기에서 설명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부르지 않는 한, 아무도 올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는 정말 미묘한 것을 말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측에 책임이 없다고 전부정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아버지가 믿지 못하게 했다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 하나 믿지 못하게 하신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가 준 사람에게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안 준 사람이 아니라 준 사람부터 떨어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드디어 여기에서, 인간측의 책임이 문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등하게 진리를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하나님은 함께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떨어져 간 사람들은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고 듣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해할수없는 어려운 이야기이다,이런 말은 듣고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떨어져 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막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수 있지만 몰라요, 모릅니다 라고 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몇년이나, 혹은 몇달이나, 혹은 며칠이나, 모두 같이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빵을 얻어 먹었고, 가족을 구원했고, 병이 낳았고, 그리고 모든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모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입니다. 보고도 여전히 뭐라고 말한 것입니까? "이 말씀은 어럽다.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책임 아래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지금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전에 함께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배반하는 자가 누군이지 알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인간으로서 오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뿐이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가 처음부터 배반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견하지 않으면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취급을 받으니까, 여기에서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반론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면, 또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반드시 올 수는 없다 라는 의미는 어떤 뜻입니까?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무리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무리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자입니다. 누구나 다 죄를 범했습니다. 태어났을때 부터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본성은 악한 성질밖에 안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무리합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도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들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들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한 순간,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는가?, 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고 싶고 반론하고 싶은것 입니다. 그리고 내 감정에 어울리지 않다. 내 생각에도 맞지 않고 있다. 내 체험, 내 경험상, 그럴수는 없다. 내 생각에서는, 내 감정에서는, 이것은 받아들려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은 사람들이 기적을 본 사람들이 반론하는 것에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배반한 사람을, 나는 누군인지 알고 있다 하셨습니다.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크리스찬 안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배신하는 자를 처음부터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바탕으로 올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부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더 자세하게 말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1-3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때부터 안식이 있어온 것입니다."

아직 구원의 은혜는 남아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으로부터 은혜로부터, 우리들이 만일에 여기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지않으면 안되는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우리들은 정말로 겸손해야 하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자가 유대인이더라도, 이방인이더라도, 똑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들은 사람은 전부 같다, 몇명이든, 어느 사람이든, 어느 시대의 사람이더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도 그들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들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결부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이 전의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의해 라는것은 어떠한 뜻입니까? 정말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복종하고 이것은 옳은 말씀, 아름다운 말씀, 위대한 진리, 위대한 교리이다. 라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고 마음에 새깁니다. 각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지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성령님이 일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예수그리스도와 결부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것이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로이드존스의 책을 읽어도, 어떤 설교CD를 들어도, 누구의 메시지를 들어도, 어떤 위대한 책을 읽어도, 유익이 않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으로 말씀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의해 들은 것입니까? 감정으로, 흥분으로, 자신의 교만에 의해, 이기주의로, 그리고 자신의 체험과 경험으로 이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라" 입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상태, 내 분량, 내 수준, 내 지금 경우,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야 한다." 입니다. 이 상태로 말씀을 들어도 아무 것도 이익이 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도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그 다음에 쓰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분노를 가지고 맹세한 것 처럼, 결코 그들을 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하나님의 기량은 창세 처음부터 이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영원히 변함이없습니다. 이 말씀에 반항하는 사람은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표현합니까? 말씀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가르침인가, 얼마나 엄격한 가르침인가, 나를 얼마나 부정하는 가르침인가, 나를 빠지게 하고, 나에게 의욕을 없애게 하는,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야만적인 가르침이다, 무신경적인 가르침이다. 사랑이 없는, 은혜도 없는, 위로 없는 가르침이다. 마지막에는 절대로 이렇게 됩니다. 절대적입니다. 반드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으면 자신에 맹세된 대로입니다. 자신에 맹세한 것을 깨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배반하는 것은 처음부터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같은 교회에서 똑같이 말씀을 듣고 있으면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배반하고 있는지, 누구에게는 말씀이 있는지,없는지 겉보기에는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오랜 신앙생활을 한 종교인에게 그 구별하는것은 어렵습니다. 종교의식은 행하고 있고, 종교적인 생활은 하고 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누구보다도 희생적이고,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종교활동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 안에 말씀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아무도 알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외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반드시 마지막으로 배반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코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님은 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끈 것은 성령쪽이 아니고 그 사람입니다. 무엇을 했을 때에? 어려운 가르침이다, 얼마나 혹독한 말인가.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반발하고 싶다. 반론하고 싶다. 거역하고 싶다. 그렇게 말한 것에 성령님이 일할 리가 없습니다. 말씀이 안에서 일할 리가 없습니다. 말씀이 생명이 되고 좀 있다가 일할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입니까? 올가미에 걸려들고 이제 달아날 수 없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랬습니다. "나를 배반한 사람은 누군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모르는 하나님이 아니고, 이 제자들이 배신하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은 이 세상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전부를 부정합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것을 증오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부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올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그리스도에게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말씀이 안에서 열매를 맺고 목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위대하며, 멋있고, 훌륭하고,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고, 은혜가 많으며, 피조물에게 얼마나 관대하시며, 얼마나 좋은 생명의 말씀인가. 귀를 기울이고 우리는 듣고 따르자. 나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순종 하자. 나는 이 위대한 분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따르자. 라고 하며 믿고, 기도하고, 요구하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깨끗해 질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언제든지, 어디에서도, 귀를 기울이고, 바라며 기다리며, 들를 때 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들를 때마다 순수하게 순종하고, 복종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따라 말씀에 결부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의하지 않고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렇습니다. 자기 성격에 맞춥니다. 자기 사고방식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야지요, 라고 말하며 종교생활만을 합니다. 마지막은 반드시 배반합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버립니다. 은혜를 받고도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듣지 않은 것보다 심한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부정했을 때, 어떤 희망이 남아 있습니까? 기독교인, 당신이 말하는 크리스찬은 성경을 읽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은혜의 구원이 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믿어서 크리스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교회에 나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씀은 싫다, 명령은 싫다, 내 생각대로, 감정대로, 성격대로, 그렇게 반발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면,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말씀이라면,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아닙니까? 이것만이 생명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이며, 진리이며, 유일한 길이다면, 이분에게 매달려 가는 것외에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건 붙이고, 중얼대고, 불평을 계속 한다면, 올가미에 빠져서, 멸망을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당신에 있어서 간단했을 지도 모르지만, 불순종이 당신에 있어서, 단순히 불평했을지도 모르지만 불순종이, "아 잊었다!" , "아 깜박했다!" 란 것으로 밖에 모른다면 하나님측에서는 이제 멸망입니다. 결코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맹세의 바탕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계속합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어제와 똑같은 생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우리들이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어떤것입니까? 이것은 중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은 목숨으로, 성령님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쉽게 기적을 요구하고, 쉽게 구원을 추구하고, 쉽게 신앙 생활을 선택하고 있지만, 그 쉬운 군소리 안에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멸망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어둠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입니다. 얼마나 난공불락한 인간의 마음일까요. 얼마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이 인간의 마음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인가? 오늘 메시지 말씀대로 실감합니다.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반응이 없는 지금 이 시대는 그런 시대입니다.

말씀은 순종이 요구됩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아직 몰라도, 성장 도중에도, 아직 우리들이 완전히 예수님을 몰라도, 반항하고 싶어져도, 아니, 거역해버려도, 마지막까지 주님을 두려워하고, 겸손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을 계속해서 거듭해 하며, 회개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의해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올가미에 떨어집니다. 인간은 약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생명의 빵, 예수그리스도가 내임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아멘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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