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48-59절

~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리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오늘 유대인과 예수님이 논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8장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한 것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귀신에게 붙잡히고 있는 사마리아인이다」 라고 말했을 때에 51절

~정말로,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고합니다. 누구나 나의 말을 지키면 그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볼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에서 또 유대인들은 대단히 분노에 불타는 것입니다.『나의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는 예수의 말대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물리적인 죽음으로, 그들은 더더욱 분노를 증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은 확실히 말해서 머리가 좋습니다. 그냥 율법을 몇백조가 있는 율법을 암기해버리고 시편은 물론이고 구약성경을 그대로 암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한줄, 한줄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말의 사소한 부분을 전부 다 통째로 암기해 버리는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말대로 언제나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8장에서 계속, 말의 말꼬리를 잡고 말을 가지고, 예수와 언제나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로 무엇을 말했는가, 또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것만으로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의 말을 지킨다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 지키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말도, 말대로 그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상의 지식인이었다고 한들, 이제 이미 종교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는 언어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것은 인간의 사람의 지혜로 알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를 매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언어라는것은 당연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로 성경이 씌어져 있고 이 『말』로 사람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성경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말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외에 방법이 없다고 하면 방법이 없지만 문제는 이 『말』이 아니라 말에 의한 『배경』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말』이 진짜 내용, 진실의 사상, 진실의 의미합니다. 그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대로, 물리적인 『죽음』만큼 구애되고 있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제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를 보면, 유대교라는 것이 이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인간의 커뮤니티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 이제 자기들의 생활에 있어서, 커뮤니티라는 형식을 잡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만으로 언제나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을 바울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1, 13절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남의 것마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영이다. 더구나 하나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이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해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힘에 있다.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이제 이미 배경을 모른다고 하는 것자체가 하나님의 영과는 관계없이, 종교인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단지의 이 세상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에게 전락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당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면, 나와 당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에다 「당신은 역시 사마리아인이며, 악마다.」라고 판단을 해 버립니다.「당신은, 결코 예언자의 한명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사탄의 자식이며, 사마리아인이다.」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방랑의 이후, 유대인의 피를 지키지 않고, 이민들과의 혼혈로, 이국인의 피가 섞이고 있으므로, 그들을 이단이라 큰 소리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이단』이라는것은 유대교의 주류가 아니다고 하는 의미합니다. 완전한 이국인이도 아닌, 이 주류로에서 벗어난 종교의 이단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인 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랍비적으로 율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선생님들, 율법의 교사들한테서 율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종교로부터 벗어난 이단의 종교. 다른 종교의 인간들. 멋대로 성경을 이용하고 멋대로 예배를 하고 멋대로 우리들과 다른 예배 방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사마리아인이다 말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유대교의 주류로 부터 빠진 사람, 이단. 그리고 우리들과는 다르는 사단의 자식, 이라고 하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완전히 나의 말이 머물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쟁은.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나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나를 경멸하고 있다. 라고 하는 말을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한 말로「당신은 역시, 마귀에게 홀리고 있는 것이 지금이야말로 분명히 알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도 전부 죽었는데도 당신은 그것보다도 먼저 있었다고 하는 것인가? 」라고 말한 다음에 논쟁에 들어가 가는 것입니다. 이 「나는 인간 등은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나는 하늘의 아버지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고 그 가르침만을 지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만을 중요시하고 인간을 가볍게 보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하늘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그 후에 계속됩니다. 54절

~「내가 만약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나의 영광은 허무한 것입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이분을 여러분들은 『우리들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아버지라고도 부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창조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하나님은 예수에게 영광을 돌려 보내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영광은 예수에게 돌려 보내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아버지의 영광을 중요시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영광을 돌려 보내지 않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려 보내는 것을 바라고 있다. 라고 하는 바람에 예수님은 거기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모두를 재판하시는 분이라고 50절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명예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이며, 그분은 재판하시는 분이다. 심판주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두를 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명예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명예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중요시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최우선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단지 하나의 유일한 소원은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칭찬하는 것이다. 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기준을 알고 있다. 모든 심판을 공평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모든 인간의 좋고 나쁨을 아는 분. 그리고 그것을 심판하는 권리가 있는 분. 그 아버지에게 나는 모든 심판을 맡기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지만 나는 하늘의 아버지를 모두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하늘의 아버지가 해야 할 모든 심판에 인간의 선악을 맡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하나 소원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라는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내가 모든 기준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를 경멸할 것인가, 이 나의 말에 머무는가, 모든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쟁은 정말 어려운 논쟁합니다. 이 나의 말이 기준이라고 단언됩니다. 그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그것을 기대하고, 예수 그리스도 본인도 하늘의 아버지가 바라는 데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유대인과의 논쟁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가치, 기준의 중심으로 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이야기 한 말씀이 인간이 아버지에게 재판받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칭찬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인가, 불순종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머물고 있을 것인가, 머물지 않고 있는가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하게 자신의 말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말을 지키는 것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킨다』란 말은, 죤 칼뱅(Calvin)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킨다』 라는것은 「네, 네」, 「그렇다, 따른다」, 라고 말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 깊숙하게 닮아 깨닫고, 보물과 같이 소중하게 하고, 그리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단지 듣고 노트에 쓰고, 녹음하고 「그렇다, 맞아」 라고 해서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기고, 소중히 여기고, 보물과 같이 애처롭고, 사랑하고, 그리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머물고 있다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머물지 않고 있는것입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이 8장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모든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하늘의 아버지는 심판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심판을 하늘의 아버지에게 전부 맡기고 있다. 이 나에게 묻지 않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절대적인 하늘의 아버지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모른다. 물리적인 죽음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죽지 않고, 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사람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예루살렘의 주변에 있고,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육체가 죽는다. 역시 마귀. 이런 가르침은 사마리아인이 틀림 없다, 라는것입니다. 말만으로, 말밖에 모른다. 혹은 말마저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 지금 유대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말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어요, 말 만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것은. 그것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도 똑같습니다. 말 만으로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못하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너무나도 말이 타락해서 바디 터치로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바디 터치는 무엇입니까? 몸만입니다. 마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것임니다. 게다가 서로 완전히 이해 하지 않는다.

옛날의 사람은 이 말을 넘어서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과 눈으로. 혼과 혼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안다고 말하는 것을, 옛날의 사람은, 전원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타락한 사람들은 말도 타락하고 정신도 타락하고 모두가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말을 사용해도, 무엇을 사용해도 커뮤니케이션이 통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그런 바디 터치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그것을 넘은 혼으로 서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한것 처럼, 사람의 영도 영으로 알고, 하나님의 영은 정말로 성령에게 따르지 않으면,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혼과 영혼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교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모릅니다. 이 유대인들 처럼 하는 것은 이제, 종교인에서는 없어져 있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가 아닙니다. 영의 세계 주민이 아닙니다. 단지 말꼬리를 쥐고, 말했는지 말하지 않했는가, 증거를 보이지 않겠는가? 어제 그것을 말했다, 말하지 않했다. 그런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예수님은.

그리고 역시 통하지 않을 경우, 상대를 마귀로 되게 만들고 그리고 통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통하지 않는 사람은 곧 잘라 버리고, 완전히 무관심하게 대한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언어의 타락 상태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도 모르고, 메시지를 들어도 모르고, 어떤 위대한 서적을 읽어도 몰라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한다. 상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상태입니다. 지독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이 당시보다 지금은 훨씬 지독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말이 기준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가 당신을 재판할 것입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가 심판하는 것은 정당하고 공정합니다. 부정이 없습니다. 이것을 계속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해서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면,그들은 역시 당신은 마귀네요. 지금이야말로 알았다.

~아브라함은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누구나 나의 말을 지킨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보다도 위대합니까? 그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예언자들도 또 죽었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

이러한 바람에 반론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반론합니다. 사마리아의 여자 때도 그랬습니다. 우물의 물로「그 물을 나에게 마시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에「당신은 야곱보다도 훌륭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기준입니다. 당신은 아브라함보다도 훌륭합니까?, 모세보다도 훌륭합니까? 저 훌륭한 예언자들 보다 더 훌륭합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도「당신은 저 위대한 우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보다도 훌륭한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는 것을 생각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

그리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당신은 50세도 되지 않고 있는데 당신은 아브라함을 본 것인가? 」 그러니까 예수님은 또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고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는 것입니다. 」~

이『있는 것입니다』는「있습니다」입니다. 진실의 이유는. 나는 거기에 있고, 있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관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이 머무르면 이 세상의 환경 등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는 의미합니다.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죽거나 살거나, 먹거나, 마시기도 하는 것에 별로 의미가 없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한 것입니다. 결코 육체가 죽지 않다거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음의 의미가 없어진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 있어서 공포라고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영원한 것이 훌륭한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말씀이 머무른다면, 알게 된다. 그 예수의 말씀이 머무른 예언자들, 아브라함, 그 수많은 예언자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오신, 1000년, 800년전의 사람이에요. 우리들은 그가 오는, 그를 기뻐한다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휘감아 올 수 있는, 아득히 이전이에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앞에 존재한 모세는 뭐라고 말하고 있을 것인가? 시편 90편 2절, 이것은 모세가 만든 시입니다.

~산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이 땅과 세계를 만들어 내기 전부터, 정말로,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입니다」라고 하는 곳에, 당신은,전에 있었다고 모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산이 만들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지구가 창조되기 전, 우주만물이 창조히시기 전부터, 당신은 있었고, 있는 것이었다. 모세는 무엇을 말하고 싶습니까? 저 장작으로 본, 나는 여호와(Jahveh)의 하나님이었다. 그 있었고, 있는 것. 당신이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있었고, 있는 것. 그 있었고, 있는 것은, 이 우주만물이 창조 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모세는 예수그리스도를 극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세가 태어난 것도, 예수님이 오시는 아득한 2000년전입니다. 그 모세가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Jahveh)의 하나님은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은 우주만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사야도 그렇게 예언하고 있고,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가 그렇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예언을 향하고, 그 모세를 향하고, 나는 모세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있었을 때부터, 있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다. 나는 모세보다도, 아브라함보다도 야곱보다도, 이사야보다도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예언자보다 나는 아득하게 위대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단지 이 논쟁만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들보다 위대하다. 나는 그들보다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있었을 때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것은 아브라함이 미리 기뻐하고 있었다.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마무레】의 나무 아래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천사의 모습을 빌려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이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은 천사를 데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3명은 천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나그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지나려고 하고 있을 때에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제 텐트에서 쉬고, 맛있는 음식을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하고, 예수님과 그 때, 아브라함은 눈과 눈을 마주치고 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기뻐하고 있었던 것은 그 때가 아닙니다. 저 【마무레】의 나무의 때도 기뻐했지만 지금의 이 때를 기뻐해서 자신이 나그네였던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히브리서에 쓰여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에녹이나 이 모든 구약의 사람들은 이날을 보고 신앙을 가지고 기뻐하고 있었어요.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 【마무레】의 나무의 때도 기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기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드시 구제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도래하고, 구세주가 도래하고, 여호와(Jahveh)의 하나님이 도래했을 때, 우리들은 구제되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은 이 도래를 실제로 천국에서 보고 있을 것인가라든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보라색의 의복을 입은 부자는 지옥에 가고, 그리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문답하고 있습니다. 그 문답하고 있는 중에, 아브라함은 천국에 있어요. 그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오셨던 2000년전에 천국에서, 소리내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날을 꿈꾸고, 이제 그는 이미 기뻐하고 있었던것입니다. 그리고, 이시야도 그 후 1000년후에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당신은, 있었고 있는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모세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나는 있었고 있는 것은, 1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나는』 1인칭입니다. 모세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하고, 앞으로도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고「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으면,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세요. 나는 여러분들과 영원히 있다」여기도 「있다」이에요. 그 때도 나는 있다, 입니다. 미래에 나는 있지만, 지금 유대인과 논쟁하고 있을 때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있었지만, 모세의 시대에도 있었지만,이라고 하는 의미합니다. 당연 그들보다도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았다. 거기에도 있었고 저쪽에도 있었고 여기에도 있다. 이것이 『에고•에이미』입니다. 단독으로 독재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라는 표현입니다. 1인칭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위대한 예언자는 죽고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있다, 그리고 후에도 있다 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화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 이다고 지금, 함께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지금 유대인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 말하거나, 반반하거나 하고 있으므로, 말로밖에 들을 수 없는데, 말마저도 들을 수 없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 것인가, 전혀 모르겠다. 단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사람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더럽히고 있는 사람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제 종교인이 아니다. 이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의 자식으로밖에 될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못하고, 자신밖에 모르고, 자기 일마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8장 속에서. 예수 대 유대인의 사이에서. 저번 주에서도 말한 것 같이, 사탄의 자식와 하나님의 자녀로 나뉘여 가는 것입니다. 분리해 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보물과 같이 그것을 여기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자녀들은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말해서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호산나, 호산나라고 말하고, 얼마나 기뻐하는가? 마태는 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구세주가 오셨다고 표현하지만 요한의 복음서는 다릅니다. 이분은 도래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있었다. 요한1장을 보면 압니다. 이분은 처음부터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고•에이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드디어 【메시야】가 온 것은 아닙니다. 다른 예언자들, 다른 마태, 마가, 누가는 그렇게 표현해도, 요한은 다른 것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다입니다. 그는 처음부터계신 하나님과 함께. 그것은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모세의 시대에도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그리고 후의 시대에도. 계시록을 쓴 요한은 그 몇천년후의 이야기를 썼을 때도 요한은「있었다」입니다. 계속 있었던 것이다 입니다. 그 말에 머무르지 않는 한, 이분을 칭찬하지 못하고, 그분을 부정한다면, 죽음을 볼수 밖에 없다, 그 말에 머무른다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 그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까 말한 대로, 육체의 죽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은 죽음이 최후의 마지막 끝이며, 최대의 것이며, 죽음 바로 그것은 공포이며 인생의 모든 가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른다면 죽음같은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문에게 과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르고 있는 사람.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에게 인하여서 밖에 깨닫지도 들을 수도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받아도 들리지 않는, 말이 통하지 않는, 단지 말꼬리를 잡고 있는것만으로 책을 읽어도, 들어도 모른다. 무엇을 읽어도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모른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싫어하는것입니다. 몇 번이나 말하는것 처럼. 이 가르침은 자신의 뱃속(마음 속)에 있는 것과 다르는 것입니다. 이질적입니다. 싫습니다. 거절입니다. 그러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지입니다. 자가감정에 맞지 않습니다. 자기의 계산과도 맞지 않는다. 자기의 계획과 완전히 맞지 않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것. 완전히 싫습니다. 반비례하고 있고, 절대적인 거절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속삭이고 있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상냥해서 온화해서 재판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부정도 되지 않고, 당신은 착한 사람으로, 당신은 행복해서, 당신은 능력이 있다. 당신은 귀엽고, 인기가 많아서, 모두가 당신을 칭찬하고 있다. 마귀가 말하고 있는 이쪽의 속삭임을 아주 좋아합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당신은 비참해서, 가난하고, 무능해서, 당신은 마귀의 자식이다고 말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거절이지요, 당연히.

우리들의 사이에, 교회에 왜 사랑이 없습니까? 과거에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사람들로부터 비난되어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았다. 상냥하게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크리스찬에 있어서,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감정은 예수의 말로밖에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우리들의 악마 성질, 사탄의 성질, 이 수족에 남아있는 죄의 성질, 이것에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외 없습니다. 과거의 뭔가가 아니다. 과거의 누군가가 아니다. 말이 아닌, 경우가 아니다. 아까 말한 것 같이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환경이 바뀐다든가, 능력이 갑자기 일으켜진다든가, 자기가 유능해진다든가가 아니라, 그런 것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상대에게 대한 미움이나 분노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 당연히 초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입니다. 감정따위 문제가 아니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죽음은 있습니다. 감정도 물리적으로는 있을 것입니다, 육체가 있는 동안은.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않는 없어지는,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혼이 하는 성령님이 머문,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감정을 안은 채로, 그것을 단단히 누를 수 없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고 하는 것밖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당신들은 이 말씀을 감정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지식으로 들어도 안된다. 진리로서 듣는 것입니다. 화내고 있다면, 사랑이 없다면, 말씀이 없는 증명입니다. 과거의 누군가, 과거의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라도 그것에 얽매이고 있다면, 평생 여기에서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애정에 만족하는 사람이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사랑받지 않은 사람이 사랑이 없습니까?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만일 그 정의가 의가, 행동에 의해 인정을 받는다면, 그리스도(Christ)의 죽음은 무의미였다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2장 21절이 되버립니다.

이것들 모든것은 말씀과 은혜와 진리와 영혼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무엇인가는 아닙니다. 과거의 누군가도 아닙니다. 그것을 언제까지라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원리를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하고 자기가 최우선합니다. 당신의 편리성이 더 좋고, 당신은 당신이 사랑받고 있으면, 모두 OK입니다. 원리는 나하고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제 환경이라든가 처지라든가 감정과는 완전히 무관계이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삼자으로서 그 원리를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끄심은 영혼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통째로 받아들여서 보물과 같이 소중히 여기고 실천한다입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한 사람입니다. 할 수 없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유대인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그가 어쨌든, 그녀가 어쨌든, 제가 어떠하더라도, 믿음은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 것과는 무관계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가? 그녀가 뭐라고 했는가?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말씀을 읽고 예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잡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기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커뮤니케이션, 예수님을 믿는 믿음, 제 안에 진리를 지켜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미움, 분노, 판단하는 마음, 그리고 질투, 질투를 그만두도록 하는것은, 그 사람의 믿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커뮤니케이션,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물처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이 은혜를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인가? 예수의 십자가는 얼마나 나에게 감사한 것인가? 이 선물은 이제 이외에, 어떤 가치에도 바꿀 수 없다. 죽음도, 남이 나를 다그치는 어떤 말도, 이 은혜에는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모든 분노를 억제하고, 질투를 억제하고, 복수심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말한 가난한 것은 그러한 것이지요. 은혜를 알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 사람을 사람과도 생각않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원리는 하나님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사람도 중요시한다. 하나님만 중요시하고, 사람을 내려다본다고 말하는 것은 영적인 원리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섬겨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한다는것입니다. 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NO! 가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NO! 제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많은데도 왜 이웃 사람을, 남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입니까고 말하는 원리란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중요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많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저는 구원받지 않았다고 정말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웃 사람은 나보다 낮을 리가 없지요. 제가 가장 가난한 것이다면, 그 이하에 내려다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은혜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무도 깔보지 않습니다. 얼굴이 좋다든가, 능력이 있다든가, 여기,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머무르다, 머물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것들 모두에 마지막으로는 실천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빛이며, 그리스도(Christ)의 편지이며, 그리스도(Christ)의 향기다고 말하는 것은, 그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실천이 없다면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있다. 머물지 않을 이유는, 자신과 예수님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있어서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자신이 무엇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어디를 싫어해서, 어디를 싫어하고 있어서, 그러므로 머무르지 않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회개하는 수 밖에 없지 않니까? 어디를 싫어하고,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그렇게 예수에게 반발하고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실천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결과를 보면 자신이 무엇이 충분하지 않을지 일목요연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감정으로 하면 무리입니다. 말만 했다고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배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부터 입니다. 예수님에게 반항하고 있으면 절대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거짓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중요합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물로 씻고, 수족을 씻고, 그리고 양의 피를 칠하고, 다음에 옷차림을 입어서 수위를 쓰고, 허리띠를, 철저한 무장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해.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심판받습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으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적대시 하는 것입니다. 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분노를 가져서 심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약으로 부터 계속 이야기 되어서,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구약으로부터 게시록까지 전부 예수님의 그 피를 보시고, 재판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심판으로부터 모면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면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머무른 사람은 죽음의 의미나 가치를 갖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날을, 정말로 아브라함이, 아직 와 있지 않은 예수님을 사는 보람으로서 기뻐한 것 같처럼, 우리들도 그 기쁨을 가져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제 그 날이 와 있는것 처럼, 기쁨을 가져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 영광을 가져 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의 이름을, 당신의 정신, 사상•철학, 성경의 말씀을 여기에서 성취해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은, 저 아브라함이 기뻐하고, 모세가 기뻐해서 다비드가 시편에서 그만큼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뭔가의 이익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느 날 꿈꾸고, 사는 보람으로 해서 기뻐해서 노래 부르던 저 노래입니다. 누가 어떤 나쁜 성격인가라는 따위는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겨 두면 좋습니다.

크리스찬끼리가 서로 미워하고 있으면, 논 크리스찬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무엇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승리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더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정을 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실망하고 주춤하고 어두운 얼굴을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간단하며 누구나 한순간에 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해요.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그 말로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에 결과,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뒤로 미뤄서는 안됩니다. 예수가 만든 세계, 성경에 쓰여져 있는, 미움도 분노도 없는, 눈물도 슬픔도 없는 것 같은 세계는 성령에 의해 가능합니다. 이 땅에서도. 그러므로 싸워야 합니다. 사탄의 나라와. 사탄의 성질과 사탄의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평생 세울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애매하게 흐지부지하게 간단히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간단히 겉으로 나타내서는 안됩니다. 억제하고, 붙잡고 절대적으로 밖에 내지 않는다입니다.

그것을 입으로 「네. 네. 그렇게 따르겠다.」는 너무 간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 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성장은 일주일에 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평생 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포기합니까? 그만두는 것입니까? 은혜에 의해 이것이 가능합니다. 능력이 아니다. 과거가 아니다. 더구나 외견의 뭔가가 아니고. 학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싸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없다면,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더 와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듣고, 이 순간 당장 시작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몇번이라도, 주님을 따르는 것을 자기속에서 몇번이라도 결단해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별해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안에 죄성과. 예수님에게 그것을 계속 원하며 기도합시다. 아멘.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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