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13-34절

~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여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느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

예수님이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셔서,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게 되면서, 재판이 벌어졌다. 오늘은 그 재판의 기록이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그리고, 사정청취 하는 이유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것은, 환자를 고친 것, 단지 그 하나만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침을 뱉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진흙을 만들고, 그것을 발랐다는 행위는, 노동을 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안식일에 관한 바리새인의 규정, 많이 있는 속에서도 이런저런 법규를 예수그리스도가 위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죄를 범한 탓으로 재판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안식날의 규칙을 어기고, 또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고 고발 당할 때에, 전에 소경이었던 남자가, 「아닙니다. 그는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으로 발전해 가지만, 여기서 사카키바라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의견이 딱 절반으로 갈라진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었던가, 어떤가 하는 논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있었던지 의문인 것이다. 그 논쟁한 끝에 유대교로부터 쫓겨난다는 사태까지 이른다는 일이 당시 있었는지, 예수는 결국 그리스도이었는가, 하는 표현을 그 당시 했던지, 그 문제가 유대교 안에서 당시 일어났던가, 하는 의문이 있어서, 딱 절반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직 생존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찾아와 물었다. 「우리들을 언제까지 불안에 빠지게 하는가,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일찍 말하시오. 」저쪽에서 먼저 말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전부터 밝혀져 있고 공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명백함으로, 그런데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유대교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다. 오히려 이것은, 1세기말,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라고 하는 논의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시점, 1세기말은, 당연 예수가 그리스도이었던지 논쟁 되어 간다. 그때까지는, 예수파에 속하냐, 하는 경고는 있어도, 또 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된다. 소문이 퍼져서도 안된다는 경고가 있었다 한들, 결정적으로 유대교에서 혹은 성전에서 쫓겨난다고 하는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없었다는 의견들이 많다.

그리고 또 다른 의견은, 혹은 당시도 만약, 그런 재판이 있었다 해도, 마태•마가•누가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었다, 하고 말한 사람이 안나온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만에 나온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주]님이시다, 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었는지 어떤가 하는 논쟁을 이러한 재판 기록을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저자의 뜻은, 어쩌면 현대나 1세기말에 많은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떠나 갔기에, 그 사람들을 향해서 씌어져 있지 않을가? 란 의견이다. 결국 그 일이 실지로 일어난 시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사람이 박해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형이 실시 되어 가는 것은, 네로 황제 이후, 1세기말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을 보면, 요한 복음서가 씌어진 당시에 일어난 사건이며, 여기 재판기록이 표현 되어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생존중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 학자들의 대강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서 논쟁되어 있는 목적이나 뜻을 좀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사카키바라 선생님이 해석하신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재판기록에는 한번도 등장 하지 않지만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죄인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언자이라면 안식일을 지킬 것이다. 」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 그는 예언자입니다. 」이라고 대답하지만, 이 예언자라고 하는 것은, 이 당시에 월급을 받아서 일하는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제사장, 예언자는 고용되어 있거나, 직업, 전문직이거나 하는 것이지만, 이 남자가 말하는 예언자는, 그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 와서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럴 수가 없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일 수가 없다고 바리새인은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알지 못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시고, 모세가 예언한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신앙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성경에 씌어져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날 때부터 죄가 가득한 사람인데 우리를 가르치려 하는가, 하고 욕을 하여 말했다. 이전에 소경이었던 남자가 예언자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에,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결국 믿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은, 다음엔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날 때에는 보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쪽으로 논쟁을 돌리고 싶다. 절대로 예수그리스도가 예언자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배울 리가 없다.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 의견을 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전에 소경이었다는 남자가 처음부터 보였다는, 결코 예수에게 치료 받은 것이 아닌 것을, 증명 시킬려고 한다. 그리고 한번 더 재판이 시작 되어, 부모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그 부모는 대답한다. 그가 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애가 보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부모는 확실히 예수그리스도가 그를 뜨게 해준 현장에는 없었고,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아들에게 들은 것뿐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부모가 「아들은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말한 것은 몰랐기 때문이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고백하면, 유대인들에게 회당에서, 또 커뮤니티에서 쫓겨나, 생활적으로 곤란해져, 여러 박해가 오고, 최후는 혹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부터 부모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 재판기록은 예수가 생존중이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경고가 있었다고 해도 이 시대에 유대교로부터 쫓겨난다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제자들은 아직 유대교이었던 것이다. 유대교로 속한 예수 믿는 파입니다. 유대교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지는 것은, 역시 1세기 말기. 예수그리스도 이름의 교회가 1세기말경에는 세워져서, 그리고 그 때에는 예수의 그룹과 유대교의 그룹이 확실히 나뉘어져 있고, 완전히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닌 종교. 유대교가 완전히 분리 되어 가는 것은, 1세기말. 그때까지는, 그들도 유대교이었다 하는, 이 사실을 보아도, 쫓겨날 리는 없다. 이 부모가 회당이나 예배나,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쫓겨날 사실이 없다는 것이, 시대적인 배경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확실히 요한이 지금, 당신은 정말로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가,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요한 복음서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말이 씌어져 있고 동시에 계시록 2장 9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제 이미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다. 요한이 복음서를 썼을 때에, 그들은 이제 유대인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사탄의 회중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요한이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재판 기록은, 그 사실 내용을 요한이 바꾸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는 그것이 현실이었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것을 요한이 왜 기록시킨 것인가? 여기에 우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부모는 예수그리스도로 떠난 사람, 유대인이라고 자칭하고 있어도, 사실은 사탄의 회중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1세기 그 당시는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를 맞아, 재산을 빼앗겨, 쫓겨났으니, 너도 사탄의 회중이니? 하는 호소를 여기서 요한은 하고 싶다. 이 재판 기록에서 부모까지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간 후, 그 남자를 불러 두 번째로 또 재판을 한다. 정말로 당신은 눈이 보게 되었는지? 이전에는 소경이었던가,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납득이 가지 않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 중에는 의견이 2개로 분열되어 있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결코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는 일파와 한편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있으리까. 하는 바리새인의 일파가 있어서, 이 재판도 분열되어 갑니다. 바리새인 안에서도 의견이 딱 절반으로 갈라지고 있다. 그런 중에 또 불리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오르며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초조해지기 시작하면서, 바리새인을 공격하기 시작해 가는 것입니다. 「놀랐어요, 여러분들은 몇번 이 재판을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모세의 율법을 모르겠습니다. 신학적인 것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답하고 있다. 이 남자가 회당에서 쫓겨나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예수님에게 「너는 인자를 믿느냐? 」란 질문에, 「인자가 누구신지 모릅니다. 」고 대답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다, 【메시아】다, 인자다, 하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남자는 인자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저는 믿고 싶습니다. 하고 예수에게 대답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저는 그런 것 모르겠습니다. 신학적인 것도, 교리적인 것도, 그리고 율법도 모르며 그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놀랐습니다. 」고 말한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이라 불리우면서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니 말입니다. 」이 말에 바리새인들이 화 내며 말한다. 「당신은 날 때부터 죄가 많으면서 지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는가? 지금 알았다. 너도 죄인이다. 」 바리새인들은 당신은 우리를 가르치는 권리가 없고, 우리야말로 성경을 알고 있으며, 모세의 제자이며, 모세파벌이며, 소속해 있는 사람이다. 너는 도대체 어느 파벌이냐? 말했을 때에,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그러십니까? 시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질투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들도 그분에게 흥미가 있는 것입니까? 관심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 점점 바리새인들은 화내고, 「당신은 회당에서 내쫓을 수 밖에 없다. 죄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을 듣지 않지만,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있는 하나는, 이전에는 안보였지만 지금은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 남자를 쫓아내 버렸다는 이야기가 오늘, 전개되어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이 어느 시대이었던가가 아니라, 이 하나만을 그 남자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해 주신 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란 것을, 저는 알고 있다. 저는 교리도 모른다. 게다가, 예수가 누구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분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 이 하나만은, 어떤 공격을 당해도, 목숨을 빼앗겨도, 진실인 것을 알고있다.

베드로후서 1장 9-10∼그러나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자는 앞 못 보는 사람과 같으며 과거의 더러운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사실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임을 남들이 알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자칭 크리스천이다라고 말하고, 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십일조 헌금을 하고, 안식일을 완전히 지키고, 그리고 교회의 일, 전도적인 일, 구제적인 일, 좋은 일을 하고 있어도 유대인들을 향하고, 한번 구속함을 받았다고 하던 사람이 한번 더 소경이 될수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것은 이전에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잊은 사람이다. 열심히 힘쓰라, 이란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좌절할 일은 없다고 한다. 베드로는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고해서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열심히 예수그리스도를 순종하라고 한다. 한번 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재판할때, 두려워서 아무 말 못했던 부모들처럼, 하는 이야기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가 하는 말씀이 들리지 않고, 영적인 소경이 된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 복음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하나를 알고 있는가, 신앙 생활에서 많은 형식을 배우고, 신앙 생활의 전도 방법, 선교 방법, 이벤트의 방법, 그리고 전도지를 만들었다 한들, 단 중요한 하나를 잊는다면, 이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하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죄가 가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구했다. 』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교만해져, 이 바리새인과 같아지면, 이제 당신은, 소경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재판 기록을 가져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이 것이 몇 세기에 씌어졌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하나를 알고 있는가, 그것을 모르는 많은 자칭 유대인이, 많은 자칭 크리스천이, 소경인 것이다. 대다수가 이렇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18세기에 존 웨슬리 라는 유명한 영국의 사제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에도 잘 나옵니다. 영국 국교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이런 형식차린, 이런 형식주의가 아닌, 감리교(Methodist) 운동을 최초에 시작한 사람입니다. 영국 국교교회를 나와서, 누구나 직접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운동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32살 때에 목사가 되어, 그리고 정식인 선교사로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존 웨슬리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중에 배안에 또 다른, 감리교 운동을 하는 이 젊은 그룹과는 또 다른, 세계각국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는 우수한 그룹이 같이 타고 있었다. 폭풍을 맞았을 때에 어느 쪽의 그룹도 주님께 예배하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맞은 편에서 기도하는 그 선교단체가 자기들보다 성령충만한 느낌이 들고, 자기들보다도 더욱 주님을 신뢰하는 그들의 예배를 보고서,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 선교 단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거기의 책임자와 만났을 때에,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뭔가 훌륭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의기양양해서 그를 찾아갔다. 그 선교사가 존 웨슬리한테 말했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 정말로 무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제 목사이며 정식인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선교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파견 받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는 물론, 「당연 알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전인류를 구하신 분입니다. 」이라고 대답한 순간, 「아니요, 제가 물어보는 것은, 당신을 구속한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서, 존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그 후, 영국으로 돌아가서 중병에 걸려, 3년후에 영국 국교교회의 성회에서 불려 마지 못해 출석 했을 때에, 마루틴 루터의 성경해석의 설교를 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 간증을 듣기는 했지만, 그 날은 특별히 그것이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주님은 내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그리고 내가 예수를 정말로 신뢰했을 때에, 내가 아주 죄가 많은 사람으로 알고,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 마루틴 루터의 간증을 듣고, 존 웨슬리는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예수그리스도가 정말로 내 죄를 구속하셨다고 깨다른것입니다. 그 정도, 영국은 물론 어디서나 그의 이 간증은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후 살아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선교로 몰두해 갔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방식이 그 이후 바뀐 것입니다. 그는 그 때 불의 성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메서디스트 창시자든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자라 불리우지만, 그들은 그런 이름을 목적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다. 그런 파벌이나 교단을 세우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죄를, 죽음에서 구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뿐입니까? 바울도 그렇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구해 주었다고 하는 이 하나입니다. 이 소경이 말합니다. 내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바리새인은 그 하나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다수의 크리스천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요일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예배합니까? 거기는 어디 교단입니까? 누가 목사입니까? 어느 신학교 출신입니까? 이 당시의 유대인과, 지금 크리스천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못 믿어서 버림받았습니다. 2천년이나 유대인은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들의 때가 올 때까지, 회개해서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2천년 그들은 유대교에 집착하고, 모세에 집착하고, 다윗시대를 집착하고, 예수그리스도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서를 쉽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진지하게 요한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유대인에게 약속은 돌아옵니다. 이 유대인에게 복음은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이방인이 버림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커뮤니티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이미 기독교는 인간의 커뮤니티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 소경처럼 그 하나를 고백 한다면, 존 웨슬리가 변한 것 같이, 마루틴 루터의 인생이 바뀐 것 같이, 우리도 변화되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카키바라 선생님이 말하신 것처럼 오히려 과학적인, 수학적인 분명한 대답이 있는 눈으로 보이는 확실한 것입니다. 오히려 불교가 철학적이어서, 어렵다. 기독교는 애매한 종교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세주로 고백하고 구원을 얻으면 다시 못 보게 되는 소경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은 완전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약하므로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정확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절망하고, 희망을 잃을 때도 한 번, 두 번이 아니지요. 그런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존 웨슬리 마저 그러한 시기가 있었다. 누구나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지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간단히 교회를 나오고나, 신앙 생활을 그만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반항한다면,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말한대로 됩니다. 신앙이 없다고 말한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요한 복음서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예수그리스도가 구해 준 것만은 알고 있다. 이외에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이외 모르기로 결심했다」우리의 영원한 신앙 고백입니다. 공부했기 때문에, 지식이 있다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내 구세주가 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열매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이 있으면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으면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존 웨슬리가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못한 것처럼, 그런 상태로 계속 있어서는 안된다. 자칭 크리스천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직 낮이 계속되는 빛 가운데 일 해야 한다. 일을 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백은 이전에는 죄인이었던데 지금은 예수가 나의 구세주임을, 나는 압니다.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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