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33-44절
~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아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이 나사로의 사건은, 이전에 말한 것 같이 그냥 기적이 아니라 나사로의 사건 이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형이 결정된, 정말로 마지막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표적이나 다른 기적과는 다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이야기는 다른 곳에도 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고, 문제가 틀리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이 죽음과 직면해 가기 위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사로의 사건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크리스천의 영화에도 있고, 옛날 사카키바라 선생님이 본 영화 중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에는 반드시 나사로의 기적이 들어있다고 하신다. 그 나사로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의 최후의 기적으로서 영화에 나온다. 그러므로 결국, 100년전의 영화나, 크리스천들이 만든 영화도, 결국 이 나사로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기적이었던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주인공이며, 요한이 헤롯 왕에게 잡혀 감옥에 있을 때에, 그 제자가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는지를 보고하러 오는데, 그 보고 중 마지막 이야기가 이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난 기적이었다. 크리스천에 있어서도 이 기적은, 아주 중요한 사건인 것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 중요한 표적이었는지, 그 많은 영화에서 이 나사로의 기적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이야기는, 정말로 예수님께서 결단 내리시고 시작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기적과는 이제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러기에 마르다가 예수님을 마중 나가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여기 오셔서 너를 찾으신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쉽게 마을로 들어오지 않고 마르다를 만났던 곳에 계셨습니다. 왜입니까? 여기서 마리아를 기다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요, 예수님이 이 마을로 들어갈 때는, 스타트를 끊을 때입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하시렵니까, 예수님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예수님 눈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통곡하며, 한탄하고 있었어요. 자기 가족이 죽은 것을. 그리고, 「이 사람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는데,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격한 감정이 들다.』 라고 쓰여져 있지만, 옛날 성경에는 『감동했다』라든가 『울었다』라고 표현하지만, 진 뜻은 『분개』입니다. 훈계하다, 꾸짖다, 격렬하게 훈계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므로, 슬프다, 괴롭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도 아니고 동정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육체를 입으셨기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개하시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동정해주셨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처음부터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 우신 것도,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우시는 분인가? 많은 신학자는 그것은 「NO」라고 말하고 있다. 존•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여기서, 분개하신 이유로서 전인류의 공통된 죽음과 지옥에 대해, 또한 전인류의 공통되는 비참함과 비극을 말한다. 인간의 저주와 고난을 보고 우시며 분개하셨다」 전인류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또 다른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때 정말로 예수그리스도가 죽음과 지옥에 대해 승리하는 결정적 순간. 」 정말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나사로를 단지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려 합니까? 아닙니다. 죽음과 지옥과의 대결을 하기 위해서, 쉽게 마을로 들어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제부터,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사망의 권세와 싸우고, 지옥과 싸우고, 사탄과 어두움이 지배했던 모든 저주와 죄를 넘어뜨리려고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후의, 마지막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의 표적은, 이 기적은 단 2절로만 끝냅니다만, 그 전에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설명은 굉장히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마리아는 예수그리스도에게 향유를 붓고, 장사를 준비한 여인이라고 최초에서 의도적으로 설명하며,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그리스도의 제사를, 최초부터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 예수님은 한편 2일도 더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다.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도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을 때, 이제 이미 예수님이 죽음을 당한다는 위기감이, 제자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죽으시려고 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죽자. 」라고 도마가 고백한 대로, 이제 예수님의 죽음이 눈앞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그럼, 우리들도 같이 죽으러 가자고 말하며, 요한은 이 사건 전에 이렇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러 지금, 이 마을에 들어오고, 이 유대인을 보시고 분개하는 이유를, 살아난 기적은 아주 짧게 표현하는 것뿐인데, 그 앞의 설명은 길다. 그러나 마르다, 마리아도, 거기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자들도, 아무도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인류가 지금, 어떠한 상황입니까? 죄로 인해 죽어있는 상태에요. 그리고 지금 바로 그것과 이기기 위해, 용사처럼 지금 예수님이 여기, 싸움터로 나선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만 와 있는 것입니다. 그 최후의 6일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간단히 마을에 들어오겠습니까? 마지막 해야 할 일, 처음부터 여기를 목표로 오셨다. 누가 이해하지 않아도, 예수님에 있어서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용사와 같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께서 준비를 하시는데 얼마나 분개하시겠습니까? 기적적인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여기서 기적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 고 말씀하시면, 마르다가 「4일이 지나가기 때문에 벌써 썩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고 중복해서 말씀하신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을 들으시는 줄을 제가 압니다. 그들이 믿게 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한 것입니다. 」하고 예수님이 몇 번이나, 믿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했다고 하신다.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혹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쓰여져 있습니다.
히브리서2장 14-15∼ "그래서" 이 자녀들은 모두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겪는 것과 똑 같은 것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오셨던 목적입니다.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죽음으로써 해결해야 했다. 그러므로 육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죽음을 멸망시키는 방법은, 『죽음』은 『죽음』으로써 해결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생명』이 죽음을 삼켜 버려야만 한다. 『죽음에서 부활한다』 는 말은,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말았다.』는 뜻이다. 인자로서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시는 것 때문에 마귀가 해 온 모든 일을 해소시키신다. 파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한다. 그것은, 마귀에게 붙잡혀서 어쩔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정말로 발버둥치는 수 밖에 없는, 칼빈이 말한 전인류에 공통된, 비참한 비극이며 저주이다. 이것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과의 대결 때문에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체험하시려 육체를 가져오셨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 는 말이 있지만, 매우 귀한 것을 얻으려면, 그 무서운 호랑이 굴에도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취소시키려면, 『죽음』을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 이 일을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분은 빛이시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이 분은 생명이었다.』 요한은 영원 그전부터 계신 분이 생명이며, 그리고 빛이며, 말씀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어두움은 그 빛을 이기지 못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왜곡되어 비틀어진 꼬인 상태이다. 처음부터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빛이며 생명이다. 이 생명에서 떨어진 결과,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 죽음이다. 이 죽음을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 처음에 있었던 생명의 상태. 처음에 있었던 빛의 상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상태로 수정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능력을 파괴시키고, 이 죽음을 전부 파기 하기 위해서는, 이 태초의 창조 때의 상태로, 생명의 상태로 회복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죽음으로 해결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의 효력이 무효가 되었다고 선언하기 위해서, 이 예수님의 고난이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과 생명이 사람 마음속에 들어올 때, 그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되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내가 생명이다, 내가 생명의 샘, 선한 목자, 양의 문,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고 하신 이유다. 이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한다. 그야말로 인류의 불행이다. 전인류에 공통된 비참함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 『죽음』이 인생의 모두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은 이것을 덮으며 삼켜버리는 힘입니다. 그것을 지금 실현하기 위해 예수가 사람이 되어 나사로가 사는 마을에 들어오고, 이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믿는다』 는 조건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은 일어났다. 그래서 믿음으로 생명을 받게 된다. 구원은 행위가 소용없음을 말한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이 있는데, 나사로는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이라고 한다. 이 나사로에 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함이며,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고 살아난 것을, 사람들이 볼 때,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책에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나사로가 그 때 죽었다 한들, 예수님이 계시면, 나사로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다고 한다. 가령, 다시 살아나지 않아도, 그 때 혹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지 않아도,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이라면, 육체가 죽어도 나사로는 죽을 일은 없다. 그것을 믿는다면, 이 기적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즉 죽음에 이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이 스코틀랜드 신학자는 그 책에서 말한다. 가령 육체가 살아나지 않아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다. 그 책의 제목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절망을 의미한다. 믿으면, 저 죽음을 다 삼켜버린 위대한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지만, 믿지 않다면,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그 병은 절대로 회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 감정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그러자, 죽은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과 발은 천으로 감겨져 있었으며, 얼굴도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천을 풀어 주어, 다니게 하여라. 」 ∼
다시 살아난 장면은 이 2절로 끝내버리고 있다. 이 당시 유대인의 매장은, 붕대를 감았다. 그런데 손과 발을 따로 둘러싸지 않다. 온 몸을 전체적으로 감긴다. 얼굴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그는 어떻게 걸어 나온 것이냐, 신학자들은 여기를 제2의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 이야기의 조리가 서지 않다고 말하지만, 요한에 있어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를 단 2절로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나사로가 걸어서 다니기는 무리하다.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여기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하셨지만, 다음 구절은 나사로가 걸어서 나왔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왔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연출로 다른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요한5장 27-29∼ 또한 아들이 곧 인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이 말을 한다고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할 것이며,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다. ∼
바리새인의 신앙의 토대는 의인은 살아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의인은 살아나서 부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종말의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무덤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난다는 것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 날을, 5장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것을 지금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는 마지막 시대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예수님의 연출이라고 칼빈들은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2개의 의미를 예수님이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도 무덤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심판을 받는다. 하는 것을 이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로, 시사하고,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믿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은, 현재, 이 시점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 날의 부활이 아니라, 저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것을 지금, 믿게 하기 위해 이 복음서는 말하고 있다.
나 개인은 여기서 왜 예수님이 분개하셨는지, 눈물을 흘리셨는지, 이 기적보다 더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시는 장면은, 성경에 2번 나온다. 깨닫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뒤돌아보시고, 또 한번이 오늘 본문이다. 나사로의 죽음의 참 뜻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않아서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미래를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 왜 우시는지 처음에 이해가 안 갔다. 칼빈이 말한 것 같이, 죽음과 지옥을 마주보고 승리하시는 순간이기 때문에, 격렬하게 영적으로, 예수님의 영이 일하신 그 대로라 생각되지만, 저는 인간의 둔감이 예수님을 슬퍼하게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마르다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한, 다른 제자보다는 훨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는 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보시고, 분개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 마음이 아프시지 않았을까. 그들의 마음은 항상 지상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을 인간은 한 사람도 이해하지 않았다. 이 큰 차이가, 지금도, 현재도, 말로는 완벽한 신앙 고백을 하는 크리스천들도 결국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3차원의 세계에서, 빛의 속도는 절대로 변함이 없다. 이것이 물리의 원리에요. 그러므로, 빛은 출발한 곳에서 도달 점까지 반드시 같은 시간으로 달려간다. 이것은, 결코 뒤집어 엎을 수 없다. 그러나 중간에서 중력이 생길 때 왜곡되어, 이 빛의 속도는 절대로 변함없지만, 도달하는 시간이 틀린다. 빛이 도착하는 시간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빛은 같은 속도로 달려 있다. 그것은, 시간만은 불변이고 우주의 원칙인 것이다. 결국 시간은 절대, 변함없다. 이 공간이 비틀어져도 왜곡되어도 어떤 장애가 생겨도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 정말로 머리를 융통성 있게 하지 않으면 이해 못한다. 이 차원은 머리가 둔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4차원의 세계이다. 이 4차원의 세계도 영적인 세계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 물리적 공식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식을 이해하지 않고 영적인 것만 이해했다면 틀린거지요. 아무런 원리도 없이 감각이나, 감정으로 「아, 그렇다.」고 말로만 해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원리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원리라면, 정말로 우리들은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은 한, 이웃사랑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이 일하지 않으면 무리 하다. 변함없는 시간처럼, 변함없는 원리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담 이후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지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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