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37-50절
~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그것은 한 알의 보리가 땅에 떨어지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씀 하신 후 36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하시고, 그들을 떠나, 숨으셨다.
∼예수님은 이 설교 뒤에서는 몸을 숨기십니다. 그리고, 이 숨겨진 후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십자가 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숨겨서, 이 다음날부터 고난주에 들어가, 오늘 말씀이 최후의 설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금요일, 십자가에서 못박으실 때, 대중은 한번 더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도 몸을 숨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몸을 숨으신데도 불구하고, 오늘 37절은, 요한의 회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37절∼
예수가 그들의 눈앞에서 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43절
∼그들은 하나님께 칭찬 받기 보다도, 사람에게 영예를 받기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
여기는 그 당시 보다는, 1세기말, 요한이 복음서를 썼을 때에, 요한이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그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 깨닫고, 그리고 쓴 것입니다.그리고 그 다음, 44절
∼ 그 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가 예수님이 몸을 숨기셨는데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한의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신뢰를 두지 못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요한은 자주, 정말로 예수님이 중요한 설교를 하실 때, 혹은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부르실 때에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실제로 큰 소리 쳤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한 메시지를 하실 때, 요한은 『큰 소리로』 말씀 하셨다는 형용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이상하지요? 몸을 숨겼는데도, 큰 소리로 말씀 하시면. 이제 듣는 대중이 주변에 없어요, 몸을 숨기셨으니까. 큰 소리로 이야기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큰 소리로』라는 말은, 이제부터 하시는 말씀내용이 정말 중요하다는 표현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또,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해도, 내가 그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 내가 한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은 내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또 어떻게 말해야할지를 내게 명령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하라고 하신 말씀그대로 말하고 있다. 」∼
여기는 이미 벌써 요한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말씀 하신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대중 앞에서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요한이 1세기말에 복음서를 쓸 때에, 오히려 매듭을 짓고 있다. 예수님의 기적도 설교도 끝났으므로, 요한은 되돌아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의 중요한 부분을 수습해서 여기에 실려 있다. 복습의 의미로, 메시지를 정리하며 중요한 부분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이미 대중도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메시지가 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6절에서 요한의 회상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한다. 아무튼 학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36절이후, 이 말을 여기서 꼭 실어야 했던가,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요한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1세기말에 요한이 회상하고, 깨닫고, 그 때는 몰랐지만, 하는 이 말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그리고 1세기의 크리스천에도, 알도록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여러가지 기억을 섞어서 썼다고 요한 복음서를 평가하지만, 범벅이 되어 쓸 만큼 요한이 어리석지 않아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안쓰여진 당시는 아직 깨닫지 못한 내용을 요한은 설명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세기말의 크리스천의 상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기독교 사정이기도 하니, 예수님이 계실때 상태와는 다른 것도 쓰여져 있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알수 있게 요한은, 요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한의 회상이 최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 숨으신 후, 지금 읽은 장소는, 예수님이 이제 이미 말씀하신 내용으로, 여기를 염두에 두고, 요한의 회상을 들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부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내가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의 메시지이었다고 하며, 왜 요한의 회상을 여기에 실었던가?
∼예수가 그들의 눈앞에서 이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
여기가 정말 중요합니다. 요한은, 많은 표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믿지 않았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계실때만이 아니라, 1세기말의 유대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말의 크리스천도, 결국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여 안믿었다. 그리고 『많은 표적』이란 말은, 요한20장에도 있다.
요한20장 30-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이 기록되지 않은 많은 표적도 행하셨다. 그런데도, 이 책에 있는 표적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요한은 다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 비교해서, 기적적인 이야기는 적습니다. 요한은 가까이에서 전부 보아서, 기억하고 있으면서, 요한의 복음서는 6개인가 7개정도의 기적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압도적으로 기적적인 이야기를 생략하는 것입니다. 일부러입니다. 잊어서가 아닙니다. 요한은 일부러 6개, 7개가 중요한 기적적인 이야기만 썼다. 이외의 많은 표적을 예수님께서 실지로 행하셨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많은 표적과 많은 기적을 보아도,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는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 갔다. 그러므로, 요한은 6개인가 7개의 기적밖에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적으로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1세기말의 요한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표적을 본 유대인이 믿지 않았는데도, 기적을 보지 않은, 그것도 6개, 7개의 기적의 간증밖에 듣지 않고 있는 이방인이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쉽게 넘어가서는 안될것이다. 「그래요, 유대인은 배반한 것이지요. 」라고, 남의 일 같이 생각 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에 있어서, 【메시야】가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십자가로 죽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시야】라하면,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승리하고, 게다가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한다.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메시야】는, 한 알맹이의 보리가 떨어지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내가 왔다, 내 영광의 때가 왔다고 하신다. 이 말을 들어도, 많은 표적을 보아도 이해 못했고, 예수님이 죽고, 많은 사람이 구원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유대인에는 정말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이 믿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보면서도 못믿었다. 그래서 요한은, 기적을 보지 않고 있는 이방인이 구원되가는 것을 1세기말에 보고있다. 또 지금 우리도 유대인이 아닌데도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6개, 7개의 기적으로 충분했습니다. 표적을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표적을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셨지만, 이 서적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왜? 믿음은 복음의 말씀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이 이시야서를 인용합니다만, 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것은, 마태•마가•누가도 그렇다. 게다가, 여기는 바울이 몇 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이 이사야 말을 들었던, 유대인은, 이렇게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인가? 이방인은 믿을 수 있었는데도, 왜, 구약 성경을 잘 알고, 구세주를 열망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열심인 나라가, 열심인 민족이, 열심인 국민이, 이 많은 표적을 보아서도 믿지 않았을가, 이방인은, 구약 성경도 모르고, 메시야가 뭔지도 몰랐던데도, 왜 이방인이 믿을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 이 이사야를 인용하여, 마가도 마태도 누가도 말하며, 그리고 바울에 있어서도 여기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에,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
∼ 그것은, 「주님이시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렇게 말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성취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이사야가 또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
여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인용하고 있으며, 1세기말의 크리스천은 유대인을 향하고, 이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이사야를 인용할 때에, 영국의 설교자의 버클리가 여기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유대인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지 못하게, 들을 수도 못하게, 마치 하나님이 절대로 믿을 수 없도록 시켰다, 그럴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지독한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는, 그런 해석이 아니라, 이 불신앙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뿐이다. 이라고 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바울도 그렇게 말 했다고, 그는 말했지만, 이 사카키바라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 이 버클리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해석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고, 그가 쓴 설교의 서적은 지금도, 목사님들이 널리 인용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여기의 해석은 틀리다고 말하신다. 이,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단지 영원한 모든 계획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유대인의 불신앙을 이용해서 이방인을 구원 하신것이다, 이런 뜻으로 요한은 말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요한은 그런 내용으로 쓰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 후,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48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 내가 한 이 말이, 마자막 날에 그 사람을 심판할 것이다. ∼
하나님은 심판 하신다고, 요한이 다음 48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보다, 이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서, 요한이 자기의 해석을 보태고 있다.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설명을, 요한만은 덧붙이고 써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오시기 전에 700년이나 가까운, 1000년 정도 전에 존재했던 이사야가, 이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유대인이 말하고 있는, 무력적 정치적 승리를 가져오는 왕도 아니고, 육체를 영원히 입은채 살아 있는 예수님이 아니다. 이사야가 본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에게는 사람에게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모습은 없었다.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벌써 예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가 본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입니다.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고, 못박아,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정말로 많은 영혼이 구원 받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제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 예언을 했다. 요한은 확실하게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클리의 해석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설마,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하는, 버클리의 해석은 틀림니다. 이사야6장 8-10
∼그 때에 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내가 말했다. [여기에,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너는 이 백성을 고집 센 백성으로 만들어라, 그들의 귀를 닫고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라. 혹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마음의 깨달음이 생겨, 내게 돌아와 고침을 받을 적이 없도로. 」 ∼
여기가 아까 인용된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고 하나님께서 채용 시험을 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쓰고, 누구를 보낼까, 했을 때에 이사야가, 열심 내어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세요. 제 입을 하나님의 입처럼, 제 손을 하나님의 손으로 써주세요」이라고 이사야는 정말로 주를 보고, 그리고 주님이 채용 시험을 하셔서, 누구를 쓸까, 했을 때에, 「네! 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 대답한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
너희가 가보고, 말해 보아라. 입을 벌려 진리를 선포 해 봐라. 점점 더 사람은 듣지 않는다. 들려주면 들려줄수로, 듣지 못한다.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귀를 닫은 것은 내가 했다. 너희가 진리를 이야기하면 이야기할 만큼, 네가 진실을 전하면 전할수로, 이 백성은 반역할 것이다. 왜? 내가 그렇게 할것이다.
여기를 다른데에서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당시의 기독교가, 유대인을 향해 완고하게 해라, 더욱더 듣지 않도록, 보이지도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것을 한것은, 나다. 그러므로, 조금전에 요한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의 다짐할 장소에서, 내가 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그 심판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누구한테? 유대인에게라고 요한은 말하고 싶습니다. 그 설명이 그 후도 씌어지고 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 속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단지, 바리새인들을 꺼리기고, 고백은 하지 않았다. 성전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 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오는 영예보다도, 사람의 영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
여기를 요한이, 이사야를 인용한 후에, 설명도 더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학자들이 말하기에는, 이 예수님이 계실때, 당시 예수님이 사형수로 처벌되는 것은, 유대교【산헤도린】이 이미 결정했다. 【산헤도린】들의 회의에서 정해졌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유대교로부터 추방한다는 포고는 아직 없었다. 그것이 선포되는 것은, 1세기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는 당시는, 많은 사람이 유대교로부터 추방 당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렬이 생긴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들은 아직 유대교의 의식을 지키고 있습니다. 완전히 기독교로 되어 가는 것은, 마가의 다락방 이후이지만, 그러므로 아직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산헤도린】이 예수를 전한 사람, 믿은 사람을, 추방한다는 포고는 없었다.
이 포고는, 1세기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왜 요한이 여기의 설명에서 이 것을 썼는가 하면, 사실 【산헤도린】 안에 이 당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추방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1세기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사형 처벌을 받으실 때에, 【산헤도린】 안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 후 1세기말의 유대인들에게도, 동시에 함께 이야기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아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헤도린】 속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백하지 않았다. 왜? 바리새인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명예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요한의 설명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까 예수님의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이사야가 설명하는 내용을 알릴려고 하는 것이, 요한의 복음서 특징입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1세기말의 요한에게는 깨달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예수님이 오신 목적, 그것은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시었다. 그리고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이 세상은 이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두워, 빛이 와서 자신의 어둠이 밝혀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참빛 가운데 오기를 싫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둠에 숨고 싶었던 것이다, 하는 설명이 요한1장에 있는 대로입니다. 그들은 어둠에 머물고 싶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형대에 오르는 예수님을 막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형으로 결정될 때에, 거기에서 입 다물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산헤도린】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믿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자신의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 당시에도 이러한 유대인이 있고, 1세기말에도 있고, 아니, 1세기말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한번 기독교에 성도가 되면서, 그들은 생애, 자기 입으로는 고백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사야를 인용하고, 요한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을 해석하는 어떤 학자는, 완전한 지식적 신앙은, 불신앙의 극치이며 절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확신이, 생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을 얻는다. 」고 설명한다. 그러데, 마음으로 믿으면서 그들은 입으로 고백하지 않았어요. 예수의 명예보다, 자신의 명예가 우선된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가 말한 것 같이, 이것은, 마음에서 믿는것만으로는 안된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믿었기 때문에 좋다는 지식만의 신앙은, 불신앙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그들에게는 없고, 확신이 생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입으로 고백한다는 말은, 야곱이 말하는, 「행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 따른, 선물로 댓가 없이 받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인간 스스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성령의 일 하심이 아니면, 하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죄 용서가 없으면, 인간은 확신을 못 가진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지 못한다. 믿었다 하는 것과, 실제로 구원을 얻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고백하지 않은 그들은, 확신과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신앙의 열매가 없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는 특별한 설명이 씌어져 있다. 확실히 1세기말에 씌어진 책이라, 1세기말의 기독교 상태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제일 신뢰 하지 못하는 복음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제일 영적인 서적이라고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영광의 때가 왔다. 그것은 한 알맹이의 보리가 땅에 떨어지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까지 희생 하면서, 지식의 신앙밖에 없는 것은, 이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형대에 오르는 것을 알면서, 그 회의에 참석하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활이 바뀌지 않고, 한 번도 손을 들지 않고, 희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이미 불신앙이라고 한다. 이것을 요한은 지금, 쓰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정확히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들이 보아서 믿고, 기적을 보고 믿고, 복음을 들어서 귀로 깨닫고, 구원 받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문을 닫는다고 하신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행동했다, 안했다가 아닙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연 우리의 능력으로 믿음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에 인해서가 아니면 무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자신의 명예입니다. 예수의 명예가 아니고 자기의 안정이며, 남의 구원이 아니였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심판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시작되는 것이다.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의 예언이며,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마 1세기말에는, 이러한 크리스천이 많았을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정말로 많은 사람이 순교 했다. 많은 크리스천이 재산을 몰수되어, 집도 뺏기는 일도 있다. 많은 크리스천이 감옥에 들어가, 1세기말에는 박해가 엄격하게, 극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도망친 자칭 크리스천이, 아마 많았던 것이지요. 복음을 버린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한 영혼은,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도우므로,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마저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반면, 저는 영광의 길을 계속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최후까지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서, 「나도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 바울같은 위대한 사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죄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 선한것도, 의도 없다. 구원을 받은 이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 누구도에요.
우리의 구원은 은혜이며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예수를 최우선 할 수 없다면, 어디에 희망이 있는지요. 하나님은 그런 무서운 일을 할 리가 없다는 이 해석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안죽으시면 인류는 절망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외에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 이외의 복음은 없다.
영원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영원한 지옥이다. 예수를 신뢰 못하면, 예수를 우선하지 못하게 되며 지옥을 우선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등을 민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쪽에서 못 들어가게 천국의 문을 잠그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정말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제 이미 그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매일, 매순간, 조심스럽게 깨어있어야 하며, 예수님을 우선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도 약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 비참한 나를 구해내는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의 나도 그래요. 이렇게 매일 기도한다 하면서 주를 반역하는, 죄의 습관이 나에게서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실망하지만, 바울이 싸운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싸워야 할것입니다. 남들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며, 입으로 고백할 수도 없고,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버린 순간에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다. 아무런 행복도 없습니다. 어떤 노력도 물거품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회사에 갈 때,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때라도 예수를 우선하고 있는지 체크를, 우리는 해야된다. 왜? 우리들의 죄 습관은 구원을 받은 후도 그냥 남아있다. 사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에 반역하여 불순종하는 죄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방식을 싫어하는 생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매일 마귀들의 공격이 우리들을 습격해 와요. 그러므로, 나를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안심해도 안되고, 제 기분, 제 생각, 나의 뜻이, 예수를 반항한다면 잘라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일 당신의 귀를 막으면, 이제 살 길이 없습니다. 지금입니다. 오늘 순종해야 합니다.
이 【산헤도린】에 속한, 바리새인들,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무 말 못했던 유대인을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산헤도린】에 들어가면서, 예수를 고백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바울이나 많은 제자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들은 죽어도, 최후까지 예수를 찬양했습니다. 간단하지 않다. 어느 시대도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간단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저 십자가길을 가신것도,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희생이었어요. 그러나, 이 길은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죽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이외 어떤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구원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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