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1-11절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 이미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요한 복음서는 기본적으로는, 1장에서 12장까지가 7개의 기적의 이야기가 씌어져 있고, 그 7개의 기적을 행하던 대상도 일반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리나, 이 13장에서 20장까지는, 『영광의 서』라고도 하며, 여기서부터는 기적을 일반 유대인 앞에서 행하신 일이 없고, 『영광의 서』 혹은 『수난의 서』라고 불리우며, 여기에서 일단 구분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3장으로부터는, 『수난의 서』 혹은 『영광의 서』는, 주로 일반 유대인이 상대가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반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13장부터는, 제자들을 교육하고, 또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13장 1절로부터 시작되는, 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는, 오늘 본문으로 매듭지은 11절의 뒤에도 계속해서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계속되여 있지만, 11절까지의 사이에도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나중에는 안다」라고 하고, 그 후 한번 더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란 말씀을 하시고, 또 하나 다른 내용이지만, 반복 되어 있는 말이 있는데, 가룟 유다에 대해서 「나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수있다. 그중에서도, 정말 중요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사건』의 이야기가 씌어져 있는 것입니다.
∼ 유월절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아셨으니,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남김 없이 끝까지 그 사랑을 나타내셨다. ∼
여기서, 『유월절 바로 전』이란, 아직 유월절의 축제(祭)가 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날에, 마지막 만찬을 했다고 생각하는 서적도 있지만, 유월절의 축제(祭) 전에, 『최후의 만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에서 연회란, 단순히 축제란 의미가 아니고,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이란 의미적인 것이지만, 희랍어에서는 『성찬식』이란 말이며, 후에 크리스천들속에서는, 희랍어의 축제, 혹은 연회라고 하는 말이, 즉 성찬식이라 불리우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제자의 발을 씻으셨는데, 무엇을 하시고 싶었는가 하면, 사실은 성찬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의 축제(祭) 전, 수난의 주의, 최후의 만찬,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연회라고 할지 식사를 하실 때에, 예수님이 성찬식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예수는, 그 사랑을 부족함이 없이 나타내셨다. ∼ 여기에서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만, 다른 성서에서는, 이러한 번역이 있다.
∼예수는 그들을 최후까지 사랑해내셨다 ∼
남김없이 모든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최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렇게 요한은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이, 발씻음, 바로 발씻음이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왜 가룟 유다가 여기에서 배신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최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과 오늘 성찬식에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김없이 사랑을 나타내셨다』도 같습니다만 그러나, 『최후까지 사랑하셨다』가 더 이해가 쉽습니다. 남김없이 보다도, 인간쪽에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최후까지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이, 이 성찬식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저녁 식사의 사이이었다.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예수를 팔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지만, 예수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아신 것과,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 그래서 저녁 식사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
여기서, 저녁 식사란 성찬식, 최후의 만찬이다. 이 식사중에, 예수님은 갑자기 저녁 식사를 중단하고, 자신의 윗도리를 벗으시며, 허리에 수건을 감고, 제자의 발을 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카키바라 선생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여기는, 정말 해석이 어려워서, 신학생들에게 여기 해석의 테스트를 낸다면, 심술궂게 생각하는 정도 여러 해석이 있어서, 아마 여기는 정말 설명이 어렵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 발씻음은 무엇이었던가? 언뜻 보니, 예수님이 수건을 허리에 감고, 베드로를 비롯해 12명의 제자의 발을 씻은 것은, 일견 봉사, 이웃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모범적인 행위로 볼수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발을 씻으신 것은, 단지 그런 이유일까? 그것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대로, 예수님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던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런 해석의 이해로 되는가? 단순한 봉사, 섬김, 그리고 이웃사랑을 가리키고 있는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 ∼
이윽고 베드로 차례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나이까? 」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나중에는 이해할것이다. 」 그랬더니,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했다. 「결코 제 발은 씻기지 못하십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만약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 ∼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 ∼ 그러자, 예수님은 또 대답하셔서,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이외는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온 몸이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깨끗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 ∼ 여기가, 문제입니다. 단순히 이것이 봉사이었던가? 단지, 제자들에게, 뭔가 말을 남길려고, 상냥하게 해서 친절하게 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이, 베드로와의 회화 안에서 알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은 너희가 모른다』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단순히 봉사라면, 단지 인간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지금 보아서 바로 이해 할수 있고 깨달을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지금은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다」 우리들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도 그렇지요? 그 때는 몰라도, 다음 날이나 혹은 10년후에, 또는 젊을 때,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그 때의 의미. 그 때가 무언가 하는 것을 더 깊이,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고,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과연 그런 뜻인지? 먼저, 무엇 보다도 수전절 때에도, 요한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때, 성전을 깨끗하게 할 때,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셨는지 몰랐지만,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것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비교해서 이해하고, 알게 되어 믿은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요한은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그 때는 몰라도,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을 때에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예수님이 거기에서 그런 일을 하시는지 몰랐지만, 영광을 받으셨을 때, 혹은 죽고 부활하셨을 때에야 우리들은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옛날을 회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0년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지금이라면 알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알고, 영광을 받으셨을 때에 안 것이다.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방에 불 성령이 내려와서 제자들의 마음에 성령님이 임재하셨을 때에 알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제자들은 그때까지 결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님에게, 아직도 이스라엘의 부흥을 빌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좋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는 무엇을 합니까? 【갈릴리】에 돌아가버리고 만다. 도저히 이해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 못한다. 그러나, 영광을 받으셨을 때에는, 죽음으로 부활하셨을 때에는 우리들에게 알게 되었다. 왜 일까요? 불의 성령이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너희들을 도우시는 보혜사가 오신다. 그 분은 너희들을 이끌며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성령이시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단순한 봉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해석을 단지 이웃사랑이라 해서 좋은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게되었다고 하고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을려고 했을 때에 「아니에요,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발을 씻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여「만약 지금, 내가 너희 발을 씻지 않으면, 아무 관계도 없다」이 말은 크리스천이 되지못한다, 천국에 가지 못하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아니다고, 예수님은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또 불필요 없이 나서서, 「그럼 머리도 손도 전부 씻어 주세요. 」하고 쓸데 없이 말했을 때에, 「아니요. 이제 너희는 발이외는 온 몸이 깨끗합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발이외는』이란 말은, 원래 성경의 원본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명백하지 못하며, 발이외라고 하는 단어가 필요한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발이외는』이라고 하는 해석에서, 결국 대부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연회에 참석할 때에 집에서 목욕한다. 목욕하고, 그리고 초대해 준 집에 갈 때에, 길을 가는 중에 발이 먼지로 더러워지므로, 그 때 발을 씻기 위하여 대야에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비유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적으로는, 이런 해석이다. 한번 예수님에게 의라고 인정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이제 다시는 목욕할 필요는 없고, 온 몸이 깨끗해진다. 그러나, 매일 혹은 그 후도 여러가지 지은 죄, 그 죄는 회개 할 필요가 있다. 이란 프로테스탄트의, 구원을 받은 뒤에는 다시 예수님에게 나아가 구원을 빌 필요는 없지만, 성화, 거룩해지기 위한 과정이 있다. 이것을 발씻음이라고 하고 있다. 카톨릭은 이것과 틀리다. 세례식을 받을 때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온 몸이 깨끗해지며, 그리고 발씻음은, 토요일의 밤, 매주, 신부님에게 고해 성사를 하며 참회를 하는, 이것이 발씻음이란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카키바라 선생님의 해석은, 그 어느 쪽도 틀린다라고 말하신다. 여기에, 『발씻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발이외란 단어를, 그런 뜻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발이외란 단어가 여기에서, 필요한 것인지? 이 말이 원본에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발이외는 깨끗하다. 그래서, 매일 짓는 죄는 남아있기 때문에, 회개하세요. 이라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한다. 과연 남의 집에 갈때마다 목욕한 습관이 있었던가? 그리고 매번 발을 씻긴건가? 그린 습관이 있었던가? 그러나,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이 직접 초대받고 가셨을 때, 논쟁이 된 것은 발이 아니고, 손이었던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의 선생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 바리새파(Pharisaioi)는 경건을 내세우고 있는 파벌입니다. 유대교 안에서도, 계율을 중요시하는 파벌이다. 그 바리새인마저, 발이 아니고, 손을 씻는 정도이었다. 매회 목욕하는 계율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습관은 당시의 유대인에는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해석으로 저녁 식사의 자리에서 일어서서 윗도리를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셨다. 하지만 4절과 동시에, 12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뒤에 옷을 입고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발을 씻기시기 전에 윗도리, 겉옷을 벗으셨다. 그리고 발을 씻기신 후, 또 겉옷을 입으신다. 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에, 옷을 입고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여기에 있듯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것은, 단순히 이웃사랑이라든가, 그러한 회개의 차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10장 17절에, 「나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또 스스로 목숨을 다시 얻는다」고 말씀 하실 때에,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얻는다』이 단어는, 원래 입다, 벗다는 의미로, 오늘 본문과도 같다. 그러므로, 겉옷을 벗은 것은, 버린다고 하는 의미이고, 겉옷을 다시 입었다는 말은, 얻다, 목숨을 얻는다는, 그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일부러, 겉옷을 벗고, 다시 겉옷을 입었다고, 왜 여기서 표현한 것인가? 그리고, 바울도, 고린도후서 5장 2-4 절
∼우리는 이 천막집에 살면서 신음하고, 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고 싶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덧입게 되면, 우리는 벌고벗은 몸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막집에 사는 동안,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천막집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렴이다… ∼
이 『천막집』은,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다. 그리고, 새로운 집을 입는다. 새로운 생명을 입는다는 뜻이며, 생명을 얻고, 그리고 생명을 버린다. 여기에서, 입다, 벗다, 고 표현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시고, 다시 입으셨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스스로 다시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여기의 연회, 저녁 식사란 성찬식이다. 그러므로, 단지 봉사적인 이야기이었던가, 혹은 다른 해석과 같이, 구원을 얻은 사람은, 매일 회개하면 된다는 그런 가르침이었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여기서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만일 네가 오늘 나의 손으로 발을 씻기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크리스천에 아니다」이 뜻은 뭔니까? 만일 내가 오늘 당신의 발을 씻기면, 너희는, 이제 온몸이 깨끗하다. 혹시, 안 씻기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 하늘 나라와 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성찬식이 도대체 뭔지, 내가 하는 것이 지금, 너희는 몰라도, 후에는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성찬식은, 지금은 모른다, 지금은 둔하고, 아직 마음이 단단해서 눈을 감고 있는 상태. 그러나, 내가 한 것을 나중에 당신은 알게 된다. 눈이 열고, 귀가 열어서, 성령이 네게 가르칠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던, 했다, 안했다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머리를 씻어 주세요, 혹은 손도 씻어달라고 한 것이나, 씻기지 말라고, 거절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와 같이 그대로, 몰라도 씻김을 받는 상태와 똑 같습니다. 어떠한 반응을 하든지,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다고 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깨닫고 있든지, 이해하고 있든지, 발이라든가 머리라든가 손이란, 그런 부위, 장소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 것은,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뒤에는 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 싶어서 하시니까, 인간측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해하지 안해도, 지금, 빈둥빈둥, 아무 생각이 없어도, 느끼는 것도, 알고 있는 일도 없지만, 실제로 관계되지 않고 있었다고 한들,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네』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베드로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라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역시 성찬식이었다고 이해할수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물의 비유를 많이 이야기 하십니다. 가나에서의 결혼식이 열렸을 때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야기가 최초에 나오며, 그리고, 【사마리아】의 여자의 때에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라 말씀 하셨고, 눈이 안보이는 자에게【실로암】의 샘에 가서 씻으라, 눈이 보게 되었을 때도, 그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자』이란 의미로 「【실로암】의 샘에 가서 씻으세요. 그리하면 보이게 됩니다」도 물을 쓰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우물이 될 것이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샘이 되거나, 빵이 되거나, 포도주가 됩니까? 빛이 됩니까? 이것은, 압도적으로, 절대적으로, 완전히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바로 그런 존재,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 당신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그것』이다.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다. 당신이 마시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느끼지 않고 있어도, 부정해도, 나는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며, 샘이며, 생명의 떡이다. 인간은 흉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계속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압도적인 말입니다. 그런데도, 발을 씻기는 일이라면 인간에게도 흉낼 수 있는 것인가? 이 봉사라면, 인간에게도 가능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한 것을, 인간도 할수 있다고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이 한 것이 인간에게도 가능합니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변함 없이[에고 에이미]를 말씀 하십니다. 에고이스트(egoist)로, 유일하고, 단 혼자, 여러분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고, 완전히 다른 신분입니다. 완전히 다른 입장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들려져진 예수님이, 여기만은,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지요. 이 것도, 예수님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히 속죄를 위한 성찬식이었다. 단순히 회개하라는 비유가 아니다. 인간의 사정과는 관계 없이, 예수님이 하신 것. 인간에게는 흉내 내지 못하는 것. 그러므로,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13장부터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일반 유대인에게 하신 말이 아닙니다. 『제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안해도, 몰라도, 거역해도, 그래도, 사랑해 내셨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고, 이해하지 않는 사람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까지 구해 주시니,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한다. 단지 발을 씻고 친절하게 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성격이라 생각해서, 그럴가? 그럼 나도 남의 발을 씻어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에서는 안된다. 성찬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 생명의 샘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속죄, 죄용서, 구원, 천국가는 길, 진리, 생명은, 단 예수님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스스로 다시 생명을 얻을수 있는 분은, 예수님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제자의 발씻기 사건, 이것이 무엇이었던가? 단순히 회개나, 이웃사랑에 끝내서는 안됩니다. 요한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고, 반드시 설명 하듯이. 이 것은 예수님 밖에 할 수 없다. 저 최후의 만찬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들이 오늘, 단순한 자원봉사와 같은 이해로, 뭔가 사람에게 친절하게 하거나, 자신이 열심히 봉사를 하거나, 자신이 뭔가, 이것, 저것 했다고 하는 이해라면, 구원이 뭔지를 알지 못한다. 요한은 여기를, 진지하게 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오해를 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히브리서 10장 10, 14, 1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몸을 드리신 제사를 통해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한 번의 제사로 그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 한번만 예수님 자신의 몸을 바치셨다. 한번의 제물이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속죄를 위한 제물은 필요 없다. 이제 죄 용서를 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말 한다. 여기는 구원의 교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신부님께 가서 고해 성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발을 씻을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의 원리를 왜곡 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마치, 인간의 의지처럼, 인간측의 행의로 가능하는 듯이, 인간에게는 뭔가 가능성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못 받은 사람이 우리보다 뒤떨어져 있을 것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구원은, 단 한번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을 바치고, 단 한 분의 제물로 해결되어, 하나님께서 다시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 완전한 구원. 이것은 인간의 사정은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한 것. 『에고 에이미』라고 부르는, 자신을 에고이스트(egoist)라고 불리는 주, 예수님이,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하는 속죄가 아닙니다. 단 한번으로 완성 시킨 것으로, 두 번 다시 인간의 죄를 상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완전한 속죄. 완전한 구원이었다. 그것은, 내가 한 것, 당신이 아니다. 『나, 예수그리스도가 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몰라도, 이해할 수 없어도, 아무 것도 느끼지 안하도, 이것은 성취되었습니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진지하게 깨달아야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단 한번 일어나, 마지막 만찬의 때, 성찬식을 행하셔서, 여기서부터 십자가의 업적과 연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즉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예수를 사랑한 적도 없는, 죄 짓고, 비참한 짐승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아 죽으셨으니,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이 믿음마저도 선물로, 은혜로 받았다. 예수그리스도가 순종함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 권력, 지배가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사도 빛이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될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어떤 피조물도 그렇습니다. 우주만물 마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붕괴되고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몇 년 다녔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믿음을 받은 사람을,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인간의 사정이 아니고, 예수님의 업적으로, 십자가에서 배반한 제자들을 최후까지 사랑해 내신 것 같이.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절대로 사탄에게는 건네주지 않는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입장인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셔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이 확신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되어, 믿음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 구원의 소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발을 씻고 서로 위로하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족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다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은혜로, 구원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믿는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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