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 하시는지 의심 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 주여 누구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젹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정말로 이제부터, 중요한 유언을 제자들에게 남기려, 영의 격동을 느끼셨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무척 괴로우실 정도, 이제부터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유다가 나간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증언을 한다는 요한 복음서 독특의, 중요한 말씀 내용이 계속되지만,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유가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때, 아직도 제자들이 서로 다툼을 하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자기의 공적이나 욕심만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예수님에 있어서, 이제부터 중요한 유언을 하는데, 장해가 되는 마음의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제자의 발을 씻겨, 제자들에게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그 장해를 없애는 것이 하나. 또 하나는 배신자를 이곳에서 추방하는 것이, 예수님이 유언을 하시기 전에, 절대로 이 두 장해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탐욕, 여전히 하나도 깨달을 수 없는 제자들. 발을 씻겨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 또 하나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을, 유언 하기 전에 여기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다는 하나의 작업은 마치시고, 그 다음에 배신자를 여기서 쫓아 버려야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 ∼
이 말씀은, 그 전에도 예수님께서 13장에서도, 몇 번이나 하셨다.
13장 2절∼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사람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예수를 팔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
이미, 이 식사의 전부터 사탄은 유다를 유혹하고 있었다. 예수를 배신하게. 그리고 예수님도, 이 중에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이 1명 있음을 말씀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른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제자중 한 사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제자 중의 한사람,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하는 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만 볼수 있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그러나, 이름은 숨겨져 있다. 도대체 누구이었던가? 여러 논의가 있는 중에서, 이것은 당연, 요한 복음서를 쓴 【세베대】의 아들 요한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그런 표현으로 기록했다. 베드로와 함께 주님이 사랑했던 제자가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장면이 요한의 복음서에는 있어서, 세례 요한이,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하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셨을 때,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 두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 [사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 하고 물으면, 「따라와서 보아라」하고 대답하셨다.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는데도, 두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라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에 한사람은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 라고 이름이 씌어져 있는데, 또 한사람은 이름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 한사람도,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장 오래 된, 첫 제자는 누군가 하면, 【안드레】와 요한이라고 말할수 있다. 최초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따라간 자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이 요한.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하는 표현을, 이 요한 복음서에서 쓴다. 그리고, 그 요한이, 오늘 예수님의 가까이 앉아 있었다. 즉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저녁 식사는, 단순히 저녁 식사가 아니고, 유월절 축제의 저녁 식사이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따른 식탁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의 식사형식과는 다릅니다. 이 당시에도, 그리스식, 로마식의 식사방식이 있었지만, 유대인의 식사방식은, 몇번 설명했듯이, 누워서, 좌팔 꿈치를 괴고 머리를 얹어, 그리고, 오른손에서 음식을 쥐어서 먹는다. 즉 누워서 먹는다. 그리고, 그것은 호를 그리듯이 누어서 먹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호】를 그리듯 누워서 먹는가 하면, 유월절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축제의 중심인 가장, 그 주최자가 가운데 앉습니다. 그 한복판에 앉을 이유는 이렇습니다. 끝에 앉아 있는 어린이들이 왜 유월절 축제때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지 질문할 경우, 주인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우리들의 선조를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갈 때에, 양의 피로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고 유월절 축제의 유래라할가,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호】를 그리 듯, 그 장로나, 유월절 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장이 가운데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유월절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당연 예수님께서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그 다음에 제1의 자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왼쪽 자리가 제1의 자리이며, 오른쪽은 제2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오른쪽에 앉아 있으니, 제2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1의 자리에는 누구나 베드로가 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리고, 【레오나루도】•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벽화에는, 【호】를 그리듯이 앉아 있지 않고, 로마식의, 식사 형태,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있는 식탁의 풍경이 그려져 있어서, 가령 옆에 요한이 앉아 있어도, 그것은 성경대로의 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이기 때문에, 회화로서 보기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지만, 성경이 말하기는 베드로는 제1의 자리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2의 자리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눈짓을 보내고 예수님께서 누구를 가리키고 말씀하셨는지 물어보라고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1의 자리에는 없다고 보야 된다. 예수님의 어깨너머로 소곤소곤 고갯짓을 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자리에서 보이는 장소, 마주 보고 있는 어딘가에 앉아 있어서, 눈짓을 보내고, 배신자가 누군가 물어보라고 지시할수 있었습니다. 당연 제1의 자리에 베드로는 앉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럼 예수님의 옆의 제1의 자리에 도대체 누가 앉아 있었던가? 그것은, 가륫•유다가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속에서 그럴거라고 상상이 간다.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이 예수님의 말씀은, 빵을 접시에 찍어 건네 줄 수 있을만 한 거리. 그러자면 옆자리 밖에 없지요? 당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왼쪽에, 제1의 자리에 있었다고 예상할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유다는 제1의 자리에 있고, 제2의 자리에 요한이 앉아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신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 때에,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내가 아니지요? 」 「설마 내가 아니겠지요? 」하고, 서로 배반자가 내가 아니지요? 하며 물어볼 정도이다. 그들은 그것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지금까지,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것을 알고 있어도, 이름을 밝힌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물론, 그러나 너희 모두가 다 깨씃한 것이 아니다고 하며, 너희 중 한사람은 마귀다, 라고도 하고, 그리고, 나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말씀 하셔도, 그 이름까지 밝힌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누가 배신자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왼쪽 자리, 제1의 자리에 유다가 앉아 있어도,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이상하게 느낄 사람은 없었다. 유다는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레 예수님의 바로 곁에 항상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300데나리온(300그램)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도, 「아깝다. 그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라고 했던 유다가, 회계사로서 예수님의 옆에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일 가까운 제자에게 말씀 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배반할 자이다. 」라고, 분명히 명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다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시편 41편 9절∼내가 신뢰하고, 나와 함께 빵을 먹는 가까운 친구가 나를 대적하고, 발꿈치를 들었다. ∼
여기 시편을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인용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이 다윗이 이것을 썼을 때에,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인 다윗은 성으로부터 쫓겨나서,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었을 때가 있었다. 사무엘하서 15장에 씌어져 있는 사건인데 그 때, 【아히도벨】이라는 다윗의 아주 가까운 부하가 있었는데, 다윗에게 애정을 받고, 신뢰를 받았던 【아히도벨】은 친구이며, 의원이기도 하니 다윗한테 따라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아히도벨】이 【압살롬】에 붙어, 그 때의 다윗에 대한 배신행위를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자기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하고, 왕의 신뢰를 준 사람이, 자기에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다윗이 【아히도벨】를 쓰고 있다. 예수님도 여기에서 이 구절을 인용 하신다. 그 『발꿈치를 들었다』는, 의미는 말의 뒷발 발굽으로 사람을 찬다는 뜻이다. 말이 뒷발로 사람을 차 쓰러뜨린다고 할 정도인 배반행위. 시편에서 다윗이 【아히도벨】을 향해서 쓴 이 구절을 예수님도 유다를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주님과 유월절 축제를 함께 한 자가, 나를 배반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그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시몬이 고갯짓을 하여, 요한에게 누군가 물어보라는 지시를 하고, 요한이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했을 때에, 「그것은, 내가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사람이다」고 대답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이 그 후, 빵을 접시에 찍어,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월절의 의식입니다. 가장이, 유월절의 의식에 따라, 가운데 자리에서, 호를 그리듯 앉아있는 사람에게 유월절 명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주인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빵을 찍어 주는 것은, 평소의 저녁 식사와는 다르다. 이것은 유월절의 의식을 진행 할 때만이다. 유대인에 있어서는, 예사로운 유월절의 의식.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에게로 들어갔다. ∼
그러나, 원본은 안 그렇다. 『한조각의 빵 뒤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 』 이것이, 원본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 발씻음의 그 때에, 이제 이미 사탄이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게. 그리고, 이 유다에게 유혹을 계속 한다. 그러나, 아직 안에 들어 가지는 않고 있다. 언제 안으로 들어갔는가? 예수님이 빵을 찍어 준 그 후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 갔다. 그러므로 원본은, 한조각의, 빵 뒤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주도권을 가진 자는 유다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유다가 유혹에 못 이겼기에, 예수님이 퍼뜩 놀라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와 같이 빵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 예언대로입니다. 순서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탄은 유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사탄은 들어 가지 않았다. 예수님이 지정한 순간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빵을 찍어 준 순간, 그 후, 사탄이 들어간 것이다. 완전히 마귀에게 들어가라고 하는 예수님의 주도적인 권리의 아래서 행하고 있다. 결코 예수님이 「네! 유다, 너희가 배반했니? 」하고 후에서 놀라거나, 결국은 그랬던가, 하고 실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스스로 생명을 얻다』 이 주권적인, 예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 주변에 사탄은 계속 있으면서도, 들어가지 않다. 결코 예수님의 허락와 지시 없이는, 사탄이 그 안에 못들어간다. 들어간 것은, 예수님이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빵을 찍어서 건네 준 자가 배반한다고 한, 그 말대로, 사탄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예수님의 주도권 밑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에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 ∼
사탄이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예수님께서 꾸무락거리지 않고, 이제 곧 그것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의회는 예수를 죽이기를 정하고, 사형벌로 결정은 했으나, 축제의 기간은 좋지 않다. 큰 소동이 되기 때문에, 축제가 끝나면 예수를 죽이자고 결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이 아니면 안되었습니다. 유월절 축제의 동안에,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그 때도 그랬다. 양의 피를 문기둥에 칠한 집은, 멸망시키는 자가 그 집을 넘어 갔다. 그것은 그 양의 피를 보아서 구원된 것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것과 똑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는 유월절의 축제 사이에 흘려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빨리 하라. 축체가 끝마친 후에 하지 말고, 이제 곧 그 일을 하라고 유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명령한 후에,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유다는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말씀하시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생각한 제자들이 이었다. ∼
그것은, 당연합니다. 회계사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나간줄로 알았다. 유월절 축제 사이에, 유대인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를 하는 것은, 유대교의 모세 율법 명령이며, 정함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러 간 것이라 생각한 제자들도 있었다. 혹은 유월절 축제의 준비를 위한 쇼핑하러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에는, 이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이 시작되었을 때에, 이 내용이 씌어져 있고, 요한의 복음서는 유월절 전날 만찬이 있었다고, 씌어져 있다. 그러므로, 요한만은 달력이 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역사가들이 있지만, 요한의 최후의 만찬도, 유월절 축제의 날에 행하여진 것이 알수있다. 유월절 축제의 전날이거나, 실은14일이 유월절이기 때문에, 그 13일이나, 12일이었다면, 식사를 중단해서까지도, 급히 쇼핑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때는 저녁이므로, 다음 날, 아침에 사러 가면 된다. 그러나, 만일 오늘이 유월절 축제 시작이라면, 무교병을 7일간 먹지 않으면 안되므로, 모자란 물건을 서둘러서 밤 가운데에, 내일부터 먹어야 함으로, 급히 유다가 밖으로 나가, 식사 도중에도 불구하고, 급히 쇼핑하러 외출했다하는 것은 이해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바람에 그런 생각을 한 제자도 있었다는 정도로, 당연 오늘이 유월절 축제의 시작이었던 것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도 이치가 맞는다. 그러므로, 축제의 전날이 아니고, 이 사건은 유월절 축제 날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내일부터 시작되는 7일간의 무교병을 계속해서 먹는 명절 사이에, 아직 부족한 물건이 있었던 거라고 추측하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만 밖으로 나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유다의 회화나 빵을 찍어 유다에 준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 사건이 일어나 있는 것 조차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밤이었다. ∼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아까도 설명 했 듯이, 예수님이 유다에 대하여 배반하는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도 제자들 앞에서 이름을 밝히시지는 않으셨다. 모두가 께끗하지 않다. 모두가 나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기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은 마귀의 자손이다 고 말씀을 하셨어도, 이것이 가룟 유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최후의 최후까지.
마태26장을 보면, 「저입니까? 제가 배반하는 사람입니까? 」하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며 묻기 시작할 때에 유다도 뻔뻔스럽게, 「그것은 설마 제가 그 사람입니까? 」했을 때에, 예수님이 「아니, 그렇다」고 하셨다. 그런데「아니, 그렇다」란, 원본은「네가 말했다」로, 씌어져 있다.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네 자신의 입에서 지금 그렇게 말했다」이라고 예수님이 유다를 향해서 대답하십니다. 「배반하는 사람은 저입니까? 」 「지금, 당신이 그렇게 말했다」예수님은 끝까지 배반하는 사람이 누군가, 자신의 입으로 밝히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원래의 품격이라 생각합니다. 유다가 배반하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계셔서, 그런데도, 제자로 뽑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3년반이나 되는 사이 유다는 가장 중요한 회계의 일을 맡고, 가장 중요한, 예수님과 언제나 가까이 미팅을 하는 상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이 유월절 축제의 의식에서, 제1의 자리에 앉을 정도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 누가 보아도, 예수님이 중요한 일을 맡겨서 유다가 거기에 앉아 있어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가령, 식사의 도중에도 예수님이 뭔가 중요한 지시를 내려, 유다가 사러 간 걸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은, 배반하는 상대가 누구며,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이라 한들, 최후까지 신사적으로, 예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최후까지, 배신자라 해서 밉살스러운 태도를 한번도 안보이십니다. 그 것을 많은 목사들은, 여기의 설교를, 유다에게 최후까지 회개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 설명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랑이기 때문에, 유다에게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요한 복음서 해석 책을 쓴 사카키바라 선생님도, 여기는 칼빈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적인 것이 아니고, 최후까지 유다에게 애정을 쏟아서 회개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저는 칼빈의 교리해석을 지지합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나를 배신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빵을 먹으며, 발꿈치를 들었다」이것은 바로 성경 말씀이 성취하기 위해서다. 그 전에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이 씻겼을 때, 모든 제자는 발을 들고 있다. 모든 제자가 배신한 것입니다. 그 후, 십자가 앞에서, 베드로도 3번이나 배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발을 올렸다는 것은, 발을 씻겼을 때에 예수님 앞에서 제자가 전원 발을 올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았다. 그러나, 이 때의 유다는 발을 올린 것이 아니라, 『발꿈치를 들었다』하는 예언이 성취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다를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다. 그리고,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도, 유다가 있는 곳만 빛이 비치지 않고, 11명의 제자는, 「저입니까? 저입니까? 배반하는 사람은 저입니까? 」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제자 위에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것이, 다 빈치가 그렸던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처음부터 제자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며 그러나 유다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이 애정을 보이고, 예수님이 정말로 신경 쓰고, 최후까지 제1의 자리에 앉히고, 최후까지 상냥하게 대해 주고, 유다의 발도 씻기시고, 유다의 배신을 정말로 알고 있으면서, 이름도 밝히지 않고 최후까지 신사적으로 행하신 것이, 회개를 예수님이 바라고 있었다면, 구원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해석이 됩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회개할 수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인간 스스로 선한 것이 있어서, 의를 선택한 것으로 된다. 인간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의지는, 아담의 타락이후, 산실되고 소멸되었다. 인간의 안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회개하는 의지나, 회개해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그런 의지는 없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내버려둬면,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못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뭔가 인간의 일부분이 하나님과 공동 작업에 인해서 가능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은 틀린것이다. 인간 안에 그런 의가 존재 하지 않는다. 인간 안에 그런 선이 있을 리가 없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알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 때 아직도 깨닫지 않고 서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주님이 부활한 후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 신분이나 지위가 걱정이었다. 그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갈릴리로 돌아가고, 어부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그들은 이해못했던 것이다. 불의 성령이 내려갈 때까지는. 예수님의 능력이 정말로 그들을 강화하지 않으면, 그들마저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지 못한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서, 예수님이 유다에게 최후까지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면, 인간의 자유의사로 구원 될수도 있다는 것으로 된다.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면, 매우 심각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의미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의인은 한명도 존재 안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해버리면, 예수님의 영광을 정말로 손상시킨다. 일부분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일부분은 인간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찬양 하지못한다. 존•칼빈은, 이것은 하나님의 찬양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유다가, 배반하는 것은 예수님이 정하고 계신다. 그것은, 성경이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의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서, 그리고 부활하셨기에 하늘의 아버지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화해를 하며 죄 용서 받아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진리이외, 인간이 하나님으로 사랑받고 은혜를 입을 요소는 없다. 인간의 뭔가의 장점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점은 1점도 없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에는 존재하지 않다. 하나님의 의앞에서는 적대하는 원수인것 뿐의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이 할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무하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정직함이 구원을 달성할 수 있다면,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했다 하면,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희생 하고 있다면, 예수님 때문에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고 하면, 근거 없는 우쭐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성령의 인도로, 드디어 회개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할 때까지는,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반항한다.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정말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이미 밤이었다. 처음부터 밤이었던 것입니다. 이 만찬은 밤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사탄이 들어간 그 순간부터 빛은 없습니다. 어둠이며,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배신하고, 예수를 죽이는 일 이외에 이제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사탄이 들어가고,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이, 다시 예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일은 없습니다. 가령 교회에 와 있어도, 가령 예수의 제자 한사람이었다고 한들, 이제 거기는 어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 이외에 길도 생명도 우리들에게는 없다.
하나님이 육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제자의 발을 씻겨, 배반하는 사람을 제1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식탁에서 같이 먹고, 그렇게 신사적으로 행하시는 예수님은 원래 그러한 품성입니다. 예수님에 있어서, 좋아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선택하거나, 바울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싫어해서 유다를 배신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지 전능 하시며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있음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헤아릴 수 없다. 알 수도 없다. 인간은 그런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알아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전부 지식으로 알려면, 오히려, 혼란에 빠지는 것뿐이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구원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거기까지 겸손하고, 인간의 구원을 달성해 주시고, 노예 위치까지, 죄수의 위치까지 내려 오셔서,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한 분노의 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로 받아 주셨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우며, 선물이었던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겸손해져서, 이제 말대꾸는 할 수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엄격하며, 무섭고, 냉정한 분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말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버리지 않고, 남김없이 사랑해 내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는 사랑이었다고 하며, 예수만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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