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31-38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내가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사람이 나를 배신한다. 그러므로,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라고 하신 후,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고, 유다가 곧 밖으로 나갔다.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기 위하여, 【산헤도린】유대교 의원들이「유월절 명절 기간은 좋지 않다」고 했던 예수님의 처형을, 유월절이 끝난 뒤에 하기로 한 예정을, 예수님은 빨리 하라고, 시일을 앞당겼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넘어 지나 가는, 성경 말씀이 성취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다 안에 사탄이 들어가기를 지정하셨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사탄이 들어가, 지금 유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유다라고 하는 장애가 없어졌을 때부터, 예수님은 여기에서 본격적인 제자들의 유언이 시작됩니다. 오늘 읽은 구절, 그 전에 행하신 제자의 발씻기는, 그중 하나의 장해인,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제자들의 사이의 피차 생긴 벽을 제거한 후에, 이 배반하는 사탄의 소행을, 이 무리부터 밖으로 낸 후에, 예수님은, 드디어 중요한 최후의, 제자들에게만 향하는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배반하는 유대인들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자기의 사람에게만 유언을 남기시려, 장해를 지금 2개 없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후 14장부터는, 요한 복음서만에 씌어진,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유언의 서론이 시작하며, 총괄이 짧게 씌어져, 더 구체적인 본론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중에서 예수님이, 「지금부터 내가 중요한 말을 한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면, 하나님께서도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
예수님이 영광을 받았다 하는 것은, 십자가의 위에서 죽고 부활했을 때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이제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리고 아버지가 인자를 영광되게 하신다. 이제, 늦을 일이 없고, 신속히 이제 곧 그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제, 받게 되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전권이 예수님에게로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자로서 오셨다. 지금, 예수님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육체 안에 전부 숨겨져,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십자가에 달려 부활은 안했습니다. 승천해서 천국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를 밖으로 낸 순간에,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십자가로 죽으실 것이 이제 확실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한 것』 「유다에게 사탄을 넣은 것은, 나다.」 「그것을 지시한 것은 나다.」 「생명을 버린 것도 내가 하고,」 「생명을 다시 얻는 것도 내가 한다.」 『내가 한 것』이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가 나간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영광을 받으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영광되게 하신다. 이제 곧 신속히, 그것은 성취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계획은 이제 성취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제자들이 아직도 서로 다툼을 하고 모르고 있다 한들 [내가 한 것]은 성취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눈에는 이제 달성입니다. 그리고, 흑암의 권세의 힘은 잃고, 그리고 죽음의 능력은 매장되고, 죽음도 생명도, 모든 권위와 세력은, 하늘 위에도 땅 밑에도,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에게서 모든 권력을 지금, 나는 받은 것이다. 왜? 아버지께서 영광을, 나를 통해서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이 중요한 유언을 선언 하신 것이다. 이제 모든 전권은 나에게 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지금, 신속히 나를 영광되게 하셨다. 이제, 여기에서 자신이 전권을 가진 것을 제자들 앞에서 알리셨다.
∼자녀들아, 내가 조금만 더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전에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말하는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
여기에서, 『자녀들아』하는 것은, 유대인의 족장들이 돌아갈 때, 이 지상을 떠날려고 할때, 반드시 유언을 남기고, 그 자손들을 축복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 때, 『어린 자녀들아. 』이라고 반드시 부른다. 그러므로 여기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유대인적인 유언의 방식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나는 너희들 곁에서 떠나 간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은 올 수 없다. 그러나, 후에서는 올 수 있다」고 말씀 하신 후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여기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과,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 이전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서 7장 33-34절 ∼ 예수님께서는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 갈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찾아 내지 못할 것이며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도 없다. 」 ∼
유대인들에게는 제자와는 완전히 달리 말하신다. 「잠시 복음은 전해질 것이다. 너희도 그 복음은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절대로 올 수 없다」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 않아셨다. 「지금은 모르지만, 뒤에서 알게 된다」고 제자에게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들 앞에 잠시동안 나는 있을 지도 모른다. 머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내가 이 땅을 떠났을 때에는, 너희에게 구원의 기회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8장 21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멀리 떠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 ∼
매우 두려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서를 읽을 때 여기를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보세요. 「내가 가는 곳에 절대로 올 수 없다.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 나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에게 지금,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다시는, 너희는 나를 볼 것도, 따라올 것도, 그리고 찾을 일도 없고, 죄 가운데에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 한다.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들에게, 특히 【산헤도린】들에게는, 분명히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똑같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제자들도 물어 보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나를 볼 수 없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고, 왜, 볼 수 없는지, 예수님이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 하고 말씀 하셨으니, 단지 죽는 줄로만 알고있다. 그 정도의 이해밖에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에게는 달랐다. 끝까지 사랑해 내신 예수님은, 「지금은 오지못하지만, 후에는 올 수 있다」고, 일반 유대인과 달리 제자들은 전혀 다른 취급을 하는 것이다. 똑같이 이해못하며,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도 못하는데,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의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리 몰라도, 나중에 알게 된다고,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 있어서, 이 약속은 큽니다. 양쪽, 이 약속 이외는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저 멸망해 가는 유대인과, 이 제자들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동류입니다. 똑같이, 죄에 인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고 명령합니다.
∼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 복음서는 1세기말에 씌어져서, 요한은 이제 상당히 나이를 먹어서, 이미 메시지 하기에는 육체적으로 힘들어져, 제자들이 받쳐 주면서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긴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된 요한이, 매번,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만을 반복하므로, 제자들이 두렵고 긴장하면서도, 「왜 같은 이야기만 하십니까? 다른 메시지도 들려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을 때에, 요한이,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고,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다면, 이제 충분하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요한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내가 【산헤도린】과 제자들을 구별하고, 유다와 11명을 구별했다. 너희를 구별한 이유는, 내가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리하면, 너희를 보고,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 불신자가 신자를 볼 때에 그 차이를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2세기경에 로마인이 크리스천을 학대하며 죽여 가는 시대가 옵니다. 그 당시, 씌어진 서적 가운데, 크리스천과 로마인이 결정적인 차이가,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크리스천들은 서로 사랑한다. 이것이, 결정적인, 크리스천과 로마인과의 차이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불신자와 크리스천의 경계선이 되어있었다. 그렇다한들, 이 명령이 얼마나 지켜져 있었나 하면, 그 후, 유명한 설교자인 요하네스•구류소스토모스가 이렇게 말한다. 「오늘,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 외에는, 이방인을 채어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을 보고 실망한다.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에 와서는 이제, 이방인마저 성경을 인정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마저, 성경의 사상을 부정 하지는 않다. 그 내용은, 그 철학은 정말 인정하고 인용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천의 사는 형태를 보아서, 장애가 되어 있다. 예수님의 유언에서, 대적하는 유대인은,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며, 제자들은, 반드시 내가 있는 곳으로 부른다고 말씀 하셔서, 그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이 중요한 새 계명이 있는데에도, 불신자들이 예수가 있는 곳에 못오는 이유가, 오히려 크리스천의 생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먼저, 거짓말 쓰고, 크리스천이 먼저 이웃사랑이 없고, 크리스천이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성경의 내용이 얼마 좋다고 해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크리스천을 보고, 사람들은 믿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간디도 같은 말을 한다. 성경에 씌어져 있는 내용은 훌륭하다. 그러나, 크리스천을 본다면, 예수를 믿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사실 그 대로입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말씀 『 서로 사랑하여라』는 무엇입니까? 요전도 메시지 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 자신을 버린다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있어도, 하나님 바로 그 분입니다. 그 능력을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채 오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셔서, 모든 영광을 지금도 소유하며, 불가능이 없으시면서, 순종하십니다. 육체 안에 다 숨기셔서, 노예의 모습까지 내려오사,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상냥하게 한 것입니까? 친절하게 한 것입니까? 빵을 먹인 것입니까? 물을 마시게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생명을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 자신의 명예,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셨다. 노예의 모습을 가지신 것입니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 안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바로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하고 싶은 대로, 나 마음대로 해서는, 이웃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감각적인 사랑은 자기 중심에서 나오지,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처음부터 타락하고 있다. 나에게는 이웃사랑이 있다고 하는 인간이 오히려 거짓말이지, 신뢰할 수 없다.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의 공을 세우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찬미의 의자를 빼앗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공적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공훈을 세우고 싶어한다. 인간은 스스로 이웃사랑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미지근한 사람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악인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그 어느 쪽도 아닌 굉장히 미지근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죄인줄 모르고 착각하는 둔감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토해 낸다고 하셨다. 가장 예수님이 싫어하는 위선자입니다. 사람에게 맞춰주면, 그것을 이 세상은 사랑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은, 『상냥한 사람,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자체, 이 시대는 의미를 오해하고 잘 못 생각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죄를 보지 않고 애매하게 하면서「 어쩔 수가 없다. 」 고 속이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하나도 버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단지 안심을 바라고, 안전된 생활을 위해서 기준을 둔다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웃사랑은, 혈육의 애정이 아닙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린다고는, 자기의 좋고 싫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자신을 없앤다는 것은, 나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우선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예수님의 뜻만이 최우선이며, 예수님이 하신 저 십자가의 희생만이, 그 사랑이 나 안에 충만해져야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주님이 그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구류소스토모스】가 말한 것 같이,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불신자와 구별하는 방법은, 이웃사랑이다. 이 세상 사람이 보다 더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더 견실하게 살고, 능력이 있고, 노력하고 있다.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 사람도 할 수 있다. 아무 차이가 없다. 믿음 있는 성도가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웃사랑만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은 자신을 버린다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구속한 사람을 최후까지 사랑해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과 보호를 믿는 사람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을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 」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지금은 왜 주님을 따라갈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느냐? 정말로, 정말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라고 할 것이다. 」 ∼
이라고 유명한 말이 나온다. 베드로는 성격이 격하다. 감정적으로 예수님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버려서 배반하며 저주할 리가 없다. 지금의 베드로 속에는 그런 배신은 존재하지 않다. 그러나, 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지금 네가 자기의 상태도 모른다. 너희 안에 지금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능력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일절 못한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언이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했지만, 여기는 단지 몇번 배반했다, 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하시는 것은 지금의 상태로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말 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무리하고, 더구나 이웃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가 함으로, 나의 영광 때문에 네가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신다. 언젠가 베드로가 갑자기 알아차려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의 성령이 임재하고, 베드로는 변합니다. 그러나, 『네가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광, 영광 있으리」하고 외치며, 부르짖고 흥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으로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나중에는 너희도 따라올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을 때에, 헤로데•아그리파 왕의 첩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음을 얻어 첩을 그만둔다고 말했다. 그것뿐인가, 로마 황제의 친구들의 아내들까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모두 회개하며, 여성들이 변화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남자들이 화를 내며 베드로를 죽일 것을 작정하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사형이 결정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놓아 주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아직 살아 남아서 해야할 일이 있고, 아직 많은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 자기들은 희생 해도, 베드로만은 놓아 줄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혼자 로마에서 나가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이 로마를 향해 걸어 오셨다. 그리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오늘 본문과 똑같이 질문을 했다. 예수님께서 「나는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달리러 간다」고 대답하신다. 「주님께서 다시 십자가에 달리십니까?」 베드로가 물으면, 「나는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달리러 간다」 이 때에, 베드로는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단 한 번 죽으셔서 전인류를 구원시켰습니다. 그것을 이해했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안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은 한 번의 죽음으로 전인류를 구원시키셨기에, 두 번, 세 번 하실 필요가 없다. 「다음은, 네가 십자가에 달릴 차례다. 」로마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에게 십자가에 달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2세기경에, 베드로의 이야기, 란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유언대로 됩니다. 「지금은 올 수 없다. 나중에 너희가 올 것이다」이라고 말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약속이 성취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는, 드디어 알고, 예수님이 가는 곳에 따라 갔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 지금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따라올 수도 없다. 」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하면 행복해진다. 」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위해 전부 버린 것 같이, 너희도 버려라. 이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나 베드로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만 합니다. 스스로 자기자신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 신앙 분량대로 한다.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뜻이나 생각을 버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아멘.
0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