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6장29-33절
~제자들은 말했다. 「아, 지금 당신은 확실하게 말씀이 되고, 하나도 우화는 하시십시오지 않다. 지금 우리들은, 당신이 일절을 알고 계셔서, 아무도 당신에게 여쭈울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들은 당신이 신에게서 오셨던 것을 믿습니다. 」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믿고 있는 것입니까? 보세요. 여러분들이 흩어뜨려져서, 각각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 나를 말라 남겨둘 때가 옵니다. 아니,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여러분들이 나에게 있어서 헤이안(平安)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 있어서는 걱정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감하세요. 나는 이미 세상에 이겼습니다. 」~
지금 아직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으로 유언을 이야기되어 오고, 이 요한의 복음서 16장, 17장은 모두, 예수님이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서 떠나 갑니다. 그러나, 한번 더 오겠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영령, 성령이 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과 직접 이야기는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이 왔을 때에는 더 구체적으로, 당신은 나를 알게 된다」라고 하는 유언의 뒤에, 오늘 본문입니다.
그 앞에 제자들은, 「어디에 가려고 여겨지는 것인가? 」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라고, 말로는 하지 않고, 단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있는데, 그 마음을 간파하고, 「여러분들은 무엇을 마음으로 중얼대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떠나 간다라고 하는 것이 아직 모릅니까? 나는 한번 더 옵니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 장소에 가면, 이제 한사람의 도움 주인, 성령이 여러분들의 장소에 옵니다」라고 제자들의 마음을 간파해서 이야기되면, 제자들이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 에스퍼(esper)와 같이 , 초능력자와 같이 , 예수님은 모두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알아 맞혀버리므로,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 지금 당신은 확실하게 말씀이 되고, 하나도 우화는 하시십시오지 않다. 지금 우리들은, 당신이 일절을 알고 계셔서, 아무도 당신에게 여쭈울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들은 당신이 신에게서 오셨던 것을 믿습니다. 」 ∼
이것은 지난 주의 계속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간파하는 분. 우리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전부 알아버린다. 말하지 않고 있어도, 전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 당신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두를 간파하고 있는, 전지 전능의 신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지금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질문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보통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면 문맥이 이상합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여쭈울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
예수님이 제자를 향해서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아서 좋은,이라고 한다면 알겠습니다. 전부 간파하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쪽이 예수님에게 이제 질문할 필요가 없으면은, 기괴합니다. 그럼 이 말이 정말인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자신들이 들려주기 전에 전부 예수님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당신은 전지 전능의 신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 확실하게, 당신이 틀림 없이 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라고 하는 것을 제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나타나에루】의 때도, 【나타나에루】가 나무 밑에 있었던 것을 예수님이 예언했을 때도, 제자는, 「아, 당신은 신입니다. 」이라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우리들은 어디에 갈까요? 당신이 영원한 목숨을 가지고 계시는데. 당신이 신의 성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라고 베드로도 고백하고 있는 대로, 지금, 처음으로 안 것이 아니고, 그 전부터 제자들은, 당신은 신의 아이입니다. 신의 성자입니다. 신의 혼자 아이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만간 되어서, 「아, 드디어 우리들은 믿었습니다. 」이라고, 여기에서 아직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은 이유가 지금,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능력자와 같이 , 상대의 기분과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신과밖에 말할 수 없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그러므로, 지금 믿었습니다. 」이라고 제자들이 말하고 있는, 믿은 정도를 보아 주세요. 단지, 예수님이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 맞힌 만의정도로, 「당신은 신입니다.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서운 것은 여기입니다. 이미 자신은 믿고, 신앙이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를 전부 알았을 작정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합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믿고 있는 것입니까? 보세요. 여러분들이 흩어뜨려져서, 각각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 나를 말라 남겨둘 때가 옵니다. 아니,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들은 지금 믿었습니까? 여기는, 원문에서는, 의문부가 아닙니다. 「지금, 믿은 것입니다」라고 의문부에서는 씌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질문하고 있는 이유(번역)이 아닙니다. 그 앞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원래에 갈 때에, 지금은 몰라도, 드디어 성령님이 당신의 안에 들어가고, 나를 알게 됩니다. 그 때가 옵니다」라고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대로, 지금, 여러분들은 모르면, 사전에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지금 뭐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니요, 우리들은 이제 알았습니다. 지금 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신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회화는, 이제, 짝짝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차원과, 제자들의 차원은 이제 틀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완전히 신앙이 없는,이라고 다그쳐서는 없다. 지금, 믿고 있는 것입니까? 라고 말하는 정도로, 믿은 것은 인정합니다. 내가 신이다라는 것을 안 것은 확실합니다. 나의 이름이 예수그리스도다라는 것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과 예수님은, 확실히 인정해서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있어도, 여러분들의 신앙은 불완전합니다. 아직, 미숙합니다. 아직 매우 약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다음, 예수님을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저는 목숨을 걸어서 당신을 따릅니다라고 말하고, 당신은 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금 믿고, 신앙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화로 듣지 않아도, 분명히 아버지를 알고, 신을 알게 되었습니다고, 대담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요, 불완전합니다. 미숙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내일 풍과 같이 없어지는 정도입니다.
실제로,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저것만 힘이 넘치고, 저것만 열심히, 신을 따른다라고 말한 제자들이, 결국 모두 어떻게 했는가?
이 요한이외의 복음서에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나옵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그 겟세마네의 기도는 씌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에 가설되어지기 전의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을 때, 유다를 비롯해, 로마 병사나 제사장,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전원, 도망쳤다고 쓰여져 있다. 전원, 예수를 버린,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이지만, 요한의 복음서에는, 그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은 씌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뿔뿔이 떨어지게 한다고 이야기되었지만, 요한은 그것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이상하게 겟세마네의 기도 현장에서 제자가 흩어졌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이제 한사람은 예수님이 잡아져 있는 현장까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의 장소에, 베드로는 있습니다. 불을 쬐면서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이 이야기되어 올지 듣고 있습니다. 흩뜨려졌다라고 말했다고, 베드로는 그 때, 도망치지 않고 있습니다. 뒤에서 도착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설할 수 있었던 장면이라도,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는, 그 십자가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회화까지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속 있었다고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마태, 마르코, 【루카】의 복음서에서는 겟세마네에서 모두 떨어지고, 모두 예수를 버려서 도망쳐 갔다고 표현해 있습니다만, 요한의 복음서에는 그렇게 표현하면 없습니다. 베드로는 도착해 가고, 요한은 최후까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예수님이 뿔뿔이 흩어져 간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 일체, 무엇이었던 것인가?
우리들은 경솔하고, 제자는 모두 예수를 배신했다. 제자는 십자가로 도망친 것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목숨을 애석히 여겼다. 이라고 하는 이해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뿔뿔이 된다고는, 십자가에 간,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행동이 아니다. 도망친, 도망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죽었을 때, 3일후에 되살아난 예수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없어지고, 보이지 않아진 후 무엇을 했니? 【가리라야】에 가버린 것입니다. 무엇을 하러 돌아갔습니까? 고기잡이를 하러 돌아가버렸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원래의, 자신의 일에 되돌아가버렸다. 신앙보다도, 이전의 자신 거처에 되돌아와버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간 가업인가 없지 않고, 목숨을 건, 걸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로 예수님이 말하고 싶은, 뿔뿔이 떨어졌다고 하는 의미는, 우리들은 열심이다고, 마치 어느 선교 땅에도 갑니다, 자 모두, 우리들도 같이 죽음의 팔은 없을지 같은 기세는,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그 당신의 신앙은 미숙해요. 정말로 미완성입니다. 단지, 신을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알았을 생각이어서, 알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면 지나친 덤빔을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절대로 신앙을 버립니다. 여기는 모든 크리스천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에는 없지만, 2세기경에는 베드로의 복음서라고 하는, 성서에는 구입하시지 않은 원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원문 안(속)은, 베드로가 쓰여져 있는, 그저 한 귀절만이 남겨져 있어서, 거기에는, 예수님이 죽은 후, 베드로와 【안데레】,그리고 이제 한사람이 고기잡이에 가서 그물을 쥐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전원, 자신의 일에 되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다그치고 있는 것은, 제자들을 향하고, 확실히 당신은 나를 믿고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확실히 교회에는 가고, 설교는 듣고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당신에게 신앙이 없으면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내일 신앙을 없애는 정도의 물건으로밖에 없다. 내일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정도밖에 없다. 왜? 여기서 열심이 없으면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의 신의 지식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절대 등 없고, 불안정하다. 인간은 아무도 같아서, 파울로이어라, 베드로이어라, 예외없음에, 정말 불완전하다. 예수님을 1회 믿었다고 고백한 정도로, 계속할 수 있는 정도 강하게는 없다. 어떤 목사라도, 어떤 선교사라도. 내일의 미(쌀)이 없어지고, 자신이 암이다라고 말해져, 자신의 상황이 몰렸을 때에, 신앙은 없어지는 정도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교한 것은 그리스도교것만으로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상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이슬람교도들은 순교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뿐입니까? 아니요, 불교 신자조차, 힌두―교도조차, 용감하게 순교하고, 죽어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말하고 있는 신앙란, 그러한 것입니까? 단지 목숨을 버리고, 단지 자살 행위와 같이 , 불의 상 걷거나, 바늘의 상 걷거나, 그런 무사수행하거나, 고행하는 것입니까? 먼저, 신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무지라면, 망하면 성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무지의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는 짐승과 다름없으면 씌어져 있습니다. 신을 모르는, 신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 내일 신앙을 없애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모른다라고 말하고, 곧 이전의 생활에 되돌아갑니다. 술을 그만둔 사람, 담배를 멈춘 사람, 크리스천이 되어서, 도둑질을 멈추고, 살인을 멈춘 사람. 내일 또 살인자에게 되돌아와버립니다. 내일 또 도둑에게 되돌아오고, 원래의 본업에 되돌아가버린다. 본심이, 본심이 나와버리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은, 엄격합니다. 크리스천만 곤난이 없어진다고는 말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만, 언제나 좋은 일이 일어나다니, 예수님은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가설되고, 세상에 미움받았다면, 나의 제자도 당연 미움받습니다」 왜입니까?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믿은 순간에, 이 세상과 결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국적이 옮겨집니다. 이제 이 세상의 아이에서는 없어진다. 사탄의 아이에게서, 신의 아이가 됩니다. 가령 실감이 나지 않아도, 가령 다른 사람이 그것을 몰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사탄쪽입니다. 악령들은 우리들이 이제 이 세상의 노예가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버려둬서는 주지 않습니다. 사탄이 공격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 공격을 해 옵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받은 박해는, 우리들도 당연 호평을 받는 것입니다. 절대로 엄격한 환경이 크리스천에도 있는 것입니다. 죽을 것도 있을 것입니다. 병조차 걸립니다. 도둑 맞아서, 지독한 것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없애는등과는, 예수님은 한번도 해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 순간에 신앙이 없어지고, 그 순간에 크리스천을 그만둬버린다. 일순이어서 이제 교회에는 가지 않게 되고, 이제 성서를 읽지 않게 되고, 기원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것은, 자신의 인생으로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흥분하기 쉽고, 큰소리 치고, 조금 인생이 엄격해진다고, 곧 불평을 해 철회해버립니다. 이것만 불평불만과, 분노와, 질투(시샘)이, 이미 있습니다. 이래서는 완전히 이 세상의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을 증오하고, 사람을 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이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방법입니다. 예외없음에, 파울로도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신을 모르면, 성령님이 일해 주지 않으면, 제 안(속)에 있는 성령님이 힘을 주지 않으면, 내일 예수를 버려버립니다. 가령 목사라도, 절대는 없습니다. 고문한 끝에에 이기는 자신따위 자력에서는 매우 무리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그 때, 신이 고문에 충분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하는, 신앙만은 가지고 있고 싶습니다. 바라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당신의 신앙은 미숙합니다. 믿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어느 것 정도에? 예수님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는,이라고 하는 정도에밖에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서는 성서를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힘입니다. 보아 말이 영적인 빵으로 음식물입니다. 우리들은 성서를 읽게 목사에게 명령되어서, 마지 못해, 마지못해서 읽으면, 음식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먹을 때에는 힘이 됩니다. 찬미도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들 지금까지 착각해서 살아 온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 생활이며, 정말로 무지했습니다. 교회 안(속)에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만큼입니다. 그 때문에에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슬퍼합니다. 예수님이 이야기되는 대로, 확실히 여러분들은 믿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완전히 알아서는 없으면,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 그 신앙은 약합니다. 당연, 내일은 없어질 지도 모른다. 정말로 바람과 같은 정도입니다. 우리들의 신앙따위. 내일, 미야기(宮城)에서 일어난 홍수가 오고, 여러분들은 찬미할 수 있습니까? 이래서는 없는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들이 오늘 본문 대로, 제자가 지금, 예수님에게 무엇을 말해지고 있을지 듣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제자와 같다. 믿은 정도가 얕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치 모릅니다. 알고 있을 생각인것만으로, 실제는 그 진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보세요, 당신이 흩어져 가는, 원래의 일에, 여러분들은 되돌아옵니다. 과 말씀을 한 것입니다.
파울로도 하고 있습니다. 제1코린트(Corinth)8장 2절∼사람이 만약,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직 모르면 안될 만큼도 알아서는 없습니다. ∼
아직도 파울로와 같은 천재는 없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5개국어를 이야기할 수 있고, 로마 시민에서, 두꺼비 리엘의 제자로, 율법의 전문가로, 게다가 유대인의 의원으로, 정치가로, 게다가 큰 부자. 그리고, 【베니야민】족출신. 그의 경력을 보아 주세요. 굉장히 머리가 좋습니다.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마저, 저는 모르면, 그가 말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에 말대꾸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매우 알고 있으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해서 자부하기 쉽습니다. 성서를 가령 10회 통독해도, 어느 것 정도 예수님을 알려집니까? 성서를 어제도 읽었습니다. 오늘도 읽었습니다라고 말해도, 얼마나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구원의 원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논 크리스천에 정확하게 예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말솜씨가 없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먼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다. 저는 지금, 정말로 모르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있습니다. 왜? 지금 처음으로 장·칼뱅(Calvin)의 책을 읽고, 성서를 정말로 모른 것에 알아차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부터 비늘입니다. 정말로 알지 않고, 단지, 열심히 성서를 읽어 왔지만, 신앙의 서적을 읽고 있었는데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다. 이 장·칼뱅(Calvin)의 성서 해석이 사실이라면, 완전히 무지와밖에 말할 수 없는다. 그러므로, 먼저 알고 있다고 하는 착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성서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관해서도, 사람에 관해서도, 누구에 관해서도,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해져서, 겸손이 되고, 두 번 다시 자부해서는 안됩니다. 재판해서는 안된다. 누구를 재판하는 것입니까? 이웃 사람을 재판합니다. 알고 있다고 말할 작정이, 사람을 재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알고 있다고 하는 오만이 멸시해서 내려다봅니다. 우리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마저 모른다. 이것은, 예수님이 경고하고, 파울로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자신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열등감에 빠지는 것은 그만둡시다. 인간 모두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금 동서, 어느 인간도 신의 지식에 비교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천국의 정보를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요? 파울로는 천국행 말야,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국을 모두는 알아 최선을 다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간 적도 없는 우리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알고 있다고 하는 오만이, 사람을 재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점.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주인이에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무지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최후, 그래도 우리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내가 이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여러분들이 나에게 있어서 헤이안(平安)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
최후의 예수님의 제자들에의 유언이, 『헤이안(平安)하게 해달라고』이었던 것입니다. 그 헤이안(平安)은, 몇 번이나 말하고 있게,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절대로 赦 되지 않는 죄가 많은 인간이, 예수그리스도가 한복판에 서 주시고, 신의 분노 앞에,그리고 십자가로 대신 징벌을 받고, 대신에 죽어 주셨으므로, 신의 분노가 나가 아니고, 예수에게 옮겨진 것으로, 우리들은 신과 화해한 것입니다. 적대하고 있었던 우리들이, 노아 홍수의 때부터 이제 신과 완전히 적대하고, 화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도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을, 신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한복판에 섰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신의 한복판에 서 주어서, 중개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과 화해했다. 신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우리들은 어차피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 예수가 말씀을 한, 「나는 남깁니다. 」이라고 하는 평화는, 신과의 화해입니다. 그 평화스럽습니다. 제 우리대로가 전부 이 세상에서 가능하게, 뜻대로 된다고 하는 것 같은 평화스럽지 않습니다. 우리대로가 통해서 언제나 마음이 온화해지는,이라고 말하는 평화스럽지 않습니다. 첫째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신과의 화해, 죄의 허락입니다. 그 평화스럽습니다. 그 다음에, 신과 화해했다면, 제 마음에 신이 있어 주시므로, 곤난은 극복할 수 있다. 왜? 신이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과의 화해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라도 아닙니다. 옆의 사람이 죽는 것 같은 것이 있어도, 제가 죽는다고 고백되어도, 방문하는 마음이 평화스럽습니다. 이것은, 돈에서는 살 수 없을 만큼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 있어서는 걱정난이 있습니다. ∼
이 곤난은, 희랍어에서는 괴로워해적인 것이 아니고, 『박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을 한 것 같이, 이 세상의 괴로움을 말해서는 없습니다. 여기는, 크리스천을 아주 좋아하는 성구로, 사카키바라 선생님에게 말 화합한다고,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여기를 암송하고,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한다든가, 자신이 지금, 돈이 없는, 회사가 嫌, 일이 없다든가, 그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암송하고 있는 성구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곤난은, 박해입니다. 예수가 받은 박해입니다.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 예수를 믿다니 바보천치처럼 보인다. 뭐라고 바보스러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조차 말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 주는 박해입니다. 그 박해가 반드시 있습니다. 오히려 기뻐합시다. 무엇입니까? 예수의 어린이 증거입니다. 만일 박해가 없다면, 이미 저는 예수의 어린이가 아니고, 이 세상의 아이입니다. 만일 나에게 박해가 있다면, 기뻐하세요. 당신이야말로, 예수의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박해가 당신에게서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곤난은 당연 있습니다. 당연 이 세상의 괴로움도, 믿고 있지 않은 사람과 같은 정도 옵니다. 평등하게, 공평하게.
∼ 그러나, 용감하세요. ∼
이 용감하라고는, 오히려 견고하세요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가 용감하세요는, 【바루테마이】, 맹인이 「예수에요, 예수에요, 나를 정말로 도와주세요. 」이라고 외쳤을 때에, 제자가, 기뻐하세요. 예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이라고 하는 개소의, 기뻐하세요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가리라야】의 호수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호수의 저쪽에서 걸어 오는 것을 보고, 무서워했을 때에, 예수님이, 「나다. 견고하세요」라고 말했을 때의 말 의미입니다. 그리고, 대표피를 앓고 있는 여자에게, 「견고하세요, 당신의 신앙이 당신을 풀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도 이 의미입니다. 그리고, 통풍의 사람에게도, 견고하세요라고 말했을 때에도, 여기의 원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용감하라고는, 『견고하세요. 』 그리고, 『기뻐하세요. 』 그리고, 여러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 그것은, 다음 이유가 중요합니다.
∼나는 이미 세상에 이겼습니다. ∼
예수님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십자가로, 먼저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 우리들을 공격하는 권위를 빼앗았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들에게 어차피 오는 『죽음』 이것을 극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3일째에 부활했을 때, 예수님은 모든 모두에 될 수 있었습니다. 육체를 입고, 섬약하게 죽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예수를 패배자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은, 예수는 위인, 의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었지 않은가라고 하는 평가밖에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위를 빼앗고, 되살아난 예수에게는, 모든 힘이 있어, 예수는 모두에 승리해버렸다. 순(숫)도 죽음도 지배하고, 지옥도 천국도 지배하고, 사탄은 예수의 발대가 되어버렸다. 아무런 권력도, 이제 가져서는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승리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세요. 견고하세요. 평안해서 있으세요. 왜? 『나는 이제 세상에 이겼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1요한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이야말로 승리로 한다」 이제 이미 세상에 이긴,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신이라고 인정하고, 제 구세주와 인정한 순간에, 나도 이 세상에 이기고 있는 것이다. 이 신앙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모두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그 신앙이 없으면, 제자들은 말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견고하세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이기는 것은, 신앙입니다. 힘이 아니고, 파워가 아니고,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이기는 진실의 힘은, 신앙입니다. 무엇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절대로 나에게 헤이안(平安)을 주는, 환경을 극복하는 힘을 주는, 성령이 나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힘을 준다. 절대로 나를 고아로는 되게 하지 않는다. 단지 뿐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신앙. 왜인가? 「나는 아버지와 같이 있습니다」라고 예수님이 말씀 지금 한다. 지금 제자를 향해서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같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십자가에 가설되었을 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니? 「신은 왜, 나를 버리러 되는 것입니까」라고 외쳤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나의 영령을 아무쪼록 맡깁니다」라고 하늘의 아버지를 향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징벌,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신의 분노는, 예수님을 일단 버린다라고 하는 것은 한다. 신이 일단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대신, 신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 신은 한번 더, 예수그리스도를 신의 오른쪽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모든 모두에 될 수 있는 것. 이것을 보면, 신이 예수를 버린 것자체가, 계획에 하나. 하늘의 아버지가 시작하기로부터 정하고 있었던 것.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어서 되살아났다」가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십자가로 죽었다」것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죽어서 되살아난, 이 이해가 필요합니다. 「죽은, 죽었다」에서는, 이 세상의 사람이 말하는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했다』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성령이 왔다. 그러므로 저는 강할 것. 왜냐하면, 파울로가 【디모테】에 편지를 보낼 때, 뭐라고 했니? 【디모테】는 마음이 약했습니다. 그 【디모테】에 파울로는 용기를 내게 하기 위해서, 「신의 영령은 겁장이의 영령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안쪽에 온 예수의 영령은, 우리들을 움찔움찔, 겁이많게 하는 영령이 아닙니다. 이 곤난에 굴복하는 정도 섬약한 영령이 아니다. 이것에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영령. 힘이 있는 신이기 때문에. 견고하세요. 속아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너는 약할 것이다. 너는 꺾여요. 너는 이제 내일 사는 기력이 잔잔해졌을 것이다라고 말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용감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아니요, 예수그리스도는 제 때문에 죽어서 되살아나고, 제 마음에 온 예수의 영령은, 결코 너 등에 굴복하는 영령이 아니다. 과 우리들은 용감하게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은, 악령이 있습니다. 없는,이라고 우리들은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 용감하게 싸우는 신의 영령이 나와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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