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31-41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

여기서 31절부터∼ " 예수께서 그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쓰여있는것 처럼 " 믿은 유대인들 "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랫동안 전하신 말씀들을 듣고 ,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권위가 있는 말씀인가 하면서 믿은 유대인, 믿지 않은 유대인이 아니고, 믿은 유대인과 지금,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논쟁하고 있는 것인가 하면 누가, 아브라함의 후예 자손인가? 란 논쟁입니다. 이것은 뜻밖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이에, 계속 이 후에도 이어지는 신학적 논쟁입니다. 감정적 논쟁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신학적인 논쟁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와 논쟁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 그 믿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두번 말씀하십니다. 두번이나.

믿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의 이야기는 옳고 정말로 훌륭한 가르침이다. 라고 듣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도중에서 예수님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고 마치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적에게 이야기는것 처럼,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말투로 바꾸어 버립니다. 믿고 있었던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믿지도 않는 자에게 대하듯,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말투로 예수님께서 바꾸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논쟁의 중심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고 있다고 자칭하는 크리스찬에게는 오늘은 굉장하게 명심해서 듣지 않으면 안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의 말에 머무른다면 당신들은 정말로 나의 제자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를 첫번째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내 말에 머무른다면 당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믿었다" 라고 하면,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어느 특정할 때 믿었다" 입니다. "계속해서 믿었다" 란 말이 아닙니다. 어느 특정한 사이만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특정한 사이만 믿은 사람을 보고, 나의 말에 머문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머문다" 에 있어서도, 여기는 "자리를 잡는다" 라고 하는 의미합니다. 자리를 잡는다는것은 마음을 열다. 그리고 마음을 열다는 것은, 마음을 완전히 비우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맡겨서 의존한다는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것이 머문다 입니다. 일시적으로 이 믿은 사람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완전히 개방하고,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정도로 텅 비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맡기고, 자리를 잡는 사람이 나의 제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자손은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하는 논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우리들이 믿은, 일시적으로 믿고, 다음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 계속해서 머무는 것인가, 라고 하는 논쟁입니다. 그 것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크리스찬들이 일시적으로 믿고 붙잡지 않으면, 반드시 어디에선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하게 교재 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예수님과 적대하는 사이로 결정되고, 예수님은 말씀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이 요한복음서 안에서 정말로 명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서는 1세기말에 씌어진 것입니다. 그 1세기말은 이미 기독교가 몇십년이나 계속되어, 지속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이방인 속에도 세워져가고 있는 시대. 그중에서 요한이 이 복음서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많은 제자가 이제 떨어져 가고 있는 상태로 이것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야기한, 제자가 된다고 고백한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요한복음서가 씌어져 있고 이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6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 ~"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

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들에게 머무르지 않고 있으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도

~"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을 하는 자이며 진리는 그 사람 가운데에 없습니다. " ~

이 요한일서의 편지에도 그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서 벗어나 갔습니다. 그것은 원래 우리들의 자, 동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래, 처음부터 머물지도 않았고 말씀이 그 무엇과도 아무런 관계도 없고, 단지 어느 때, 일정한 시간만 믿은 사람이었다고 요한은 1세기말에 이 것을 대단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많은 제자가 떠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규슈(九州)의 사가(佐賀)에, 그 엄격한 우상숭배의 도시에서 개척 전도한 한 분이, 24년 동안에 천 명 이상의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렇게 많은 교인이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세례를 준다고 한다. 그리고 제대로 선별해서 엄선한 끝에 세례를 주어야 한다, 는 같은 기독교로 부터 비난을 받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책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형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엄선한 끝에에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중에서부터 생각을 바꾸었다. 그것은 세례를 받고 싶다,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 믿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그것을 바란다면, 저는 줄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례 받은 후, 언제까지나 나는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카키바라 선생님도 교회에서 40%가 제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것 뿐만 아니라, 교회에 속합니다. 교회 성도로서 이름을 기록한 사람 속에 통계로부터 40%인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사람. 그러나 그 숫자는 결코 작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40%라고 말하면, 반 가깝습니다. 반 가까운 사람은 교회에 들어왔지만 또 교회를 나갑니다. 물론, 목회의 배려가 모자란다는 점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 결과를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독한 가르침이다." 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직접 함께 말씀하시고 있는데도, 관계 없이 떨어져 간 사람들이 많다하면, 오히려 우리들이 이 40% 제명하고 교회에서 떠나 갔다라고 하는 숫자는 오히려 우리들이 말씀에 충실했다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있다고 그 선생님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준 후도 예배에 참가하지 않고, 기독교로부터 벗어나가는 사람에게 책임은 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 목사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행해지고 있는 "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도대체 누구냐 "라고 논쟁하고 있는 상대는 유대인이고, 하나님께 언제나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논쟁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도대체 누구가 라고 말했을 때에, 믿은 사람이, 머물지 못했던 사람과, 머무른 사람과의 갈라지는 길로, 지금 논쟁의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후에 말씀하시기에는,

~" 그때에 너희는 진리를 알고,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그들이 예수에게 대답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결코 누구의 노예로 되본적도 없습니다. 당신은 왜 "너희들은 자유로워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다. 나의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죽음을 보는 것도 없고, 여러분들은 자유로워집니다 "라고 말했을 때에, 유대인들은 대단히 화를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혈육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피, 자손이다는 긍지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속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면서 "나라에서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구원된다 "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누구의 노예가 된 적도 없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은 자유롭다. 자유를 당신에게서 받을 필요는 없다. 라고 지금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물리적으로 정말로 자유인 인가 말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이사만이 우리들의 왕이다."고 고백하고 있는것 처럼,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서, 로마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면으로 보면 자유로웠는가 라고 하면 그들은 언제나 우상예배를 되풀이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 앞으로 처음으로 이끌어 나왔을 때도 그렇고, 그 후도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 언제나 우상예배를 만들어 온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로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왜? 우상예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예배하는 사람은 죄의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노예이면서, 자신들은 노예가 아닌,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누구에게서의 강제로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자유롭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으까. 라고, 예수님과 지금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 노예는 영원히 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은 영원이 있습니다. "~

여기 아브라함의 자식은, 약속의 아들,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있었고 여종의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의 아들 이스마엘은 하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납니다. 왜? 노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문을 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집을 계승하는 것은, 상속을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자식이 아니면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노예가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는 없다. 반드시 쫓겨나고, 여기에서 나간다. 정말로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자식밖에 없다. 그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만의 말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노예이면 결코 이 하나님의 집에 머무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노예 라고 말하는 개념을 이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자신들은 자유롭다. 하나도 죄의 노예가 아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회개 하세요 "라고 하는, 하나님의 불러 주셨을 때에,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입으로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라든가, 마음 속에서 후회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생활에서, 실제의 눈에 보이도록 변하고 있지 않는다면, 단순한 후회이며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정말로 나쁜 일을 했다, 정말로 이것은 해서는 안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 뿐이며 결코 회개가 아니다. 그 회개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머물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의 회개라면, 그 사람의 인생 모두를 회개해야 하고, 일부분, 어떤 부분, 실패한 부분, 뒤떨어져 있는 부분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 바로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하여, 그 견해가 바뀌는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용납하고,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 온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면, 그것은 죄었고, 미워하고, 싫증 나고, 혐오를 하고, 그리고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과정들이 진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무르고 있는 사람의, 진실한 표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죄라는 것은, 한번 또는 두번 범한 죄, 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의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고, 계속해서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었던 사람, 미지근한 사람, 죄에 대하여 견해가 변하지 않은 사람. 혹은 아무것도 생활 습관이 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죄의 생활을 계속하고, 죄의 습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진리는 없습니다. 죄의 노예입니다. 하갈의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집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잇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서는 물론 요한일서에, 몇 번이나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현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울에 있어서도 똑 같습니다. 이 시대에서도 이제 이미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장 6절,

~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하여 죄를 짓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진정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요한일서 3장8-9절 " 마귀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죄를 지어 오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죄를 지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을때, 그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짓고 살 수 없습니다." ~

하나님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죄를 질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이제 이미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결코 예수를 알지도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을 자기의 생각이나 생활 습관, 체험, 그리고 하고 싶은 것, 생각하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옳은 것이며, 받아드릴 가치가 있는 것이며 기쁘며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한다고 하는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었다고 말해도 그것은 오른쪽에서 왼쪽에게 묻고, 조금 감동하고, 그리고 왼쪽으로 빠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결코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집에서 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과 교제 한것이 아닙니다. 왜? 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죄의 노예입니다. 아직 사탄의 자식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 지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사탄의 자녀로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사탄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벨과 가인의 때 부터 딱 절반에 인류가 갈라진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속하고 있는가, 속하지 않고 있는가 지금 논쟁을 합니다. 이 죄의 노예는 결코 하나님을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머무는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 사탄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을 연모하고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람에 언제나 유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자체, 바로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아주 좋아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자식이고 죄의 노예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결코 여기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 칼빈(Calvin)이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믿음은 고백의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 지배로 부터의 해방, 죄의 단죄로 부터의 해방, 이 죄에 의한 하나님의 분노로 부터의 해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의해 용서받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결코 머물지 않고 타락하고 떨어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아바 아버지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입니다.

바울도 이야기 합니다. " 우리들은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다." 라고 로마서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머물지 않고 타락할 수가 없다고. 이것은 교리적으로 결코 뒤집어 엎어질 수 없는 진리중에 진리, 현실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예수님이 반드시 그 사람을 머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반드시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사탄이라도, 이 세상에서도 뒤집어 엎을 수 없는 힘입니다.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물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의 진리가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가 용서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어납니다. 그 많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칭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Christ)의 집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상속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죄의 노예는 나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논쟁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정말로 그 가르침은 훌륭하고, 가르침으로 살아가고, 그 가르침에 내 인생 그대로를 맡기고, 내 생각도, 습관도, 좋고 싫음도, 전부 다 나는 이제 절대로 단절하겠다, 버리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머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주님에게 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구원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되지 않고 있는데도 교회에 다니고 구원되지 않고 있는데도 말씀을 듣고 구원되지 않고 있는데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되고 있지 않는데 정말로 많은 기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물지는 않고 있습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군냐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는 후에 이것이 논쟁중의 논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유대인들이 개종하고 율법주의적인 크리스찬, 아브라함에게서 온 유대인적인 유대교적인 크리스찬이 많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유대교대 기독교의 싸움조차, 지금 정말로 빈번하게 있는 것에도 관계 없다, 입니다. 이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사람들, 그래도 율법주의에 아직 빠지고 그리고 자신들은 유대교의 사상으로부터 빠져 나가지 않는 자칭 크리스찬들이 교회안에 많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논쟁의 회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당시의 기독교 성도들은. 그중에서 야곱의 편지가 대표적이며 "행동으로 인하여 명백해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의 크리스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행동을 보여 주시오.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사탄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제자가 아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제자라고 말한다면, 예수그리스도를 정말로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그 "행동"으로 판단을 할 수 있고 그 "열매"로 판단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유대교 주의적인 크리스찬, 율법주의적 크리스찬에 대한 회답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갈 때에, 할례를 해야 했다. 유대인과 같은 율법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특히 강조하면서 "아니다, 행동이 아니다. 믿음에 의해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된 것이다." 라고 바울은 이 유대인들에게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에 정말로 격해 있어 불꽃이 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크리스찬이라 말하더라도 유대교적인 율법주의적인 크리스찬이 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들은 아무도 구원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교회안에서 대단하게 넣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제자들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본체에 머무르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되지 않는다, 입니다. 그것을 구세주다. 하나님이다. 부활해서 승천한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한 목격자조차, 사탄이라도 그런 것은 알고 있다, 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실제로 부활한 예수님을 본 사람들. 실제로 많은 기적을 본 사람들이 "그는 하나님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머물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머물다고 하는 것은 결코 죄의 습관이 계속될 수가 없다, 입니다. 죄의 노예가 될수가 없다. 스스로 이것을 꽉 누르고, 육체를 죽일 수 없다고 할수가 없다, 입니다. 죄를 보는 각도가 바뀌고, 심하게 죄에 대한 혐오감과 미움이 이처럼 분명히 알게 된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죄를 질수가 없다." 그리스도(Christ)의 자녀가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러므로 떨어져 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역사상에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것을 말씀하셨고, 바울도 이야기하고, 요한도 들려주고,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에 있어서도 세레 요한이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든가 마음으로 생각해서도 결코 안된다. 여러분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회개하시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도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런 후회이라든가, 눈물을 흘린 슬픔이라면, " 회개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이 루터입니다. 또 존 칼빈(Calvin)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회이며 회개가 아니다. 회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문을 노크하고 있는 사이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간측에서 후에, 인생을 되돌아보면 너무 힘들어서, 인생을 되돌아보면 결실이 없고, 그리고 보답도 없는 것을 보고, 후회해서 울고…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단순히 회한과 후회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다. 진리를 얻을 수 있는 말씀을 받는다. 성령이 일한다고 한다, 라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작업이 없는데 죄의 허락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사탄의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입니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구원된 것인가 아닌가 확인하라, 입니다. 원래 구원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떨어져 간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머물지 않고 있다. 말씀이 안에 없다, 이것도 당연합니다. 결코 내주고 있지 않습니다. 결코 예수그리스도가 최우선으로는 없습니다. 결코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이 제일로, 최우선으로 완전히 생각되지 않고 내 생각, 내 체험, 내 취미, 내가 좋고 싫음, 내 감정, 내 모든 이상론이 앞 섭니다. 이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완전히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거만해 가는 것입니다. 증대해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인에게 분노를 다스려라 라고 말해졌을 때에 지배하지 않으면 증대해지고, 어찌할 도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말씀이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이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입니다. "언제까지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떠나 갑니다." 입니다. "나는 반드시 떠나 가서 아버지의 원래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알게 하고 있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사이에, 하지 않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들이 자유로워진 것은 정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고 완전히 죄로부터의 해방된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사탄의 어두움의 힘이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그러한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지금까지 죄를 연모한 것에서 풀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모두,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사람은 타락 하지 않습니다. 왜? 성령님이 나를 반드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굉장한 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해방,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이 세상의 자유와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저기 도망쳐 다니고 움찔움찔하고 노예처럼 붙잡히는 공포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노예입이다. 자유란? 어떤 구박이 있어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재하시고 말씀이 머물고, 성령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머물지 않는다면, 죄의 노예가 되서 죄의 종노릇하며 노예처럼 사는것이 머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집에서 언젠가 나가는 것입니다.

"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완전히 말씀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있지만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 않는가? 당신들이 정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것처럼을 행했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마므레의 상수리나무에 있었을 때에, 예수님과 천사가 왔을 때에, 환영하며 맞이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사람들을 정말로 환영한 것입니다. 송아지를 잡고, 빵을 굽고, 그들이 발을 씻고 쉴 수 있게 맞이하며 환영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 하늘에서 보내 온 사람을 한눈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기의 집에 초대, 완전한 파티를 합니다. 이것이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브라함을 따라 할수는 없다. 받아들이지도 않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사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 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나를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얼마나 행복해서,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사람을 아브라함은 바라며 기다려서 기뻐한 것인가? 이것이 아브라함이 한 것들입니다. 당신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듣고 감정으로 흥분했을 때만 믿고 그리고 자신보다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환영하고 맞이한적이 없습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믿은 그것뿐이지, 아직도 죄를 연모하고 있고, 예수님의 명령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습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최우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당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서는 왜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1세기말에. 그리고 2세기가 지나고, 3세기가 지나도 이 것은 변함없습니다. 계속 이렇게 기독교는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무는가, 머물지 않는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 석방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고, 구원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을 바울이 매우 깊은 교리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교리는 무엇인가, 구원은 무엇인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죄로부터 해방되었는데도 당신들은 왜 그렇게 죄를 아직 연모하고 이 죄의 노예가 되고 있는 가입니다. 지배하라고 말했을 때에 왜 지배하지 않는가? 육체를 왜 죽이지 않습니까? 왜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서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은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정말로 죄에서 해방되고, 정말로 구원 되었다. 사탄이나 어두움의 힘은 이제 두 번 다시 나에게 손을 댈수 없다. 어떻게 말하지 못하는 기쁨,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행복, 뭐라고 말하지 못하는 위대한 진리, 뭐라고 말하지 못하는 위대한 하나님. 이렇게 한다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것을 남겨 두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끝까지 싸웁니다. 왜? 싫기 때문에. 그러나 죄를 좋아하는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고 자신의 마음에 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절대로 나의 죄를 못쓰게 만드는, 절대로 나의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나는 아직 믿음이 약해서 못하는데, 지금은 못하지만 나중에.. 등등 말하는 사람은 하갈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 믿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말해도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내일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일은 내일, 하나님의 복음은 내일로 연장시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는 아직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성격이 이렇기 때문에, 하지만 아직 할 수 없고, 하려고 생각해도 아직 할 수 없기 때문에, 약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머물지 못합니다. 하갈의 아들이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머물고 싶으면, 이삭처럼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의 자녀, 절대적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자녀입니다. 그 자녀들은 자신이 지금 어떤 죄를 지어도,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것은 권리를 얻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에게 가까워지는 특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하나님에게 가까워지는 권리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가까와 지는 권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하나님께 복종 한다는, 그 자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대담하게 접근할 수 있을 수가 없지요. 아담과 같이 숨을 수 밖에 없고, 가인과 같이 무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복종 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이웃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없어서, 지금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과는 다릅니다. 나는 육체를 죽이고, 지금까지의 똑 같은 습관, 같은 생활을 보내지 않는다. 같은 성격이 아니고, 같은 태도로 하지 않고, 같은 그러한 부정적인 말로 이야기하지 않고,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그 어두운 얼굴도 안하고, 절대적으로 세운다고 말한 사람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명령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원리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숨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움찔움찔하며 노예와 같이 하나님 앞에 숨을 수 밖에 없습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영적인 싸움은 육체의 싸움이 아닙니다. 옆의 사람과 싸움도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속의 분노에 화내고, 이 자기 속에 있는 질투에 화내고, 부정적인 생각에 화내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혐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 이것이 성경에 쓰고 있는 논쟁입니다. 유대인 대 예수님, 바울 대 유대인. 그리고 정말로 옛 크리스찬들이 이 논쟁에서, 이겨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2 천년 동안 순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기독교인의 입장입니다. 달콤한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의 장소입니다. 영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천국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고민의 상담실도 보육원도 아닙니다. 직업훈련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병원이 아니고,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 어떤 역할을 다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절대로 죄와 싸운다.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자가 된다.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쓸쓸하다든가, 괴롭다든가 말하는 교회가 되며 안됩니다. 아무런 매력도 아무런 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를 우리들은 논 크리스찬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연약한 무능한 모습을 논 크리스찬 앞에 나타내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절대 이대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패배하는, 그런 기독교인 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싸운다. 이것이 우리들 기독교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나에게서 좋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나는 승리하고 결코 지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아멘.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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