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1-16절

~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멀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라는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은 예루살렘의 교외, 올리브산의 남동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지금 계시는 곳에서 시간적으로 하루의 거리입니다. 지금 베다니에서 사람이 찾아와,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 베다니란 이름은, 현재 아랍어로 「엘・아살」. 「나사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의미다. 그 정도, 이 나사로의 사건은 이후 오랫동안 전해진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엘・아살」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신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다.」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엘・아살을 짧게 말하면 「나사로」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하는 뜻의 이름이며, 그리고 현재도 마을 이름이 「나사로의 마을」이라고 할 만큼, 베다니에서 이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은 유명한 사건으로, 현재도 이 마을 사람은 나사로의 사건을 믿고 있다.

이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난 사건은, 이 요한 복음서에서의 마지막 표적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표적은 이전의 소경의 눈이 뜬 표적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나사로의 사건 이후, 회의 결정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형이 정해졌다. 그러니까, 이 나사로가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결정되어 간다. 이것은 기적의 표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겹쳐서 쓰여져 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이 열린 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 때도, 「이 사람의 죄 때문에 소경입니까?, 혹은 부모가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직접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다.」라고 예수님이 진단을 내리고 있듯이, 여기서도, 나사로는 죽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라고 나사로의 죽음을 진단할 때도, 이 소경이 보게 된 사건과 같은 진단의 방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소경이 보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야말로 세상에 온 참 빛이며, 내가 그리스도다.」하셨다. 이 소경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분명히 하려고 하신 것처럼, 이번 나사로의 죽음도,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다.」 하는, 이 주제를 예수님이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것은 죽고 끝나는 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최초부터 설명하신다. 이제까지의 기적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자매들은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이 들었다.」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3 남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의 이야기는 다른데서도 나옵니다. 예수님을 너무 지나치게 환대해서 자매끼리 싸움이 일어났다. 하물며, 마리아는(막달라 마리아와는, 딴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 주었던 그 여인이다. 예수님이 죽으실 그 6일전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이른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기 위해,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제자들도 그 때, 이 마리아의 행위를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했다. 그렇게 비싼 향유를 산다면, 가난한 사람을 돕던지, 혹은 헌금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런 쓸데 없는 일을 하였느냐. 라고 제자들은 이 여자를 꾸짖었다.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제자들이 아직 모를 때에도, 제대로 매장의 준비를 하였다. 그 정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3명의 남매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받는 이 3명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어떤 인간이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러를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가난해서, 숙소가 없고, 묵는 집이 없다는, 그러한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일, 예수님의 계획,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직무,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아버지의 일을 행하기 위한 모든 고난, 이것을 이해하던 3남매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이 3명도 똑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는, 예수님을 배려하던 3명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전에 마가 복음서에 있듯이, 낮에는 성전에서 설교하셨지만, 저녁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다니에 가셨다. 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 3남매 집에 묵었다는 설이 큽니다. 이 마지막 6일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정말로 예수님이 매우 힘든 최후에 시간을 3명의 집에서 보내셨습니다.

왜입니까?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정말로 불편한 시골이며, 먼 거리를 예수님이 걸어서 이 집을 가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이 3명만큼,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둘 곳이 없다고 하셨지만, 마지막 6일간은, 베개를 베고 누을 곳이 있었습니다. 이 가족은 부자이고, 고급 요리로 대접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 이 집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요한 복음서를 해석하신 사카키바라 선생님도, 전도 여행하러 다니며, 전도 집회에 초대되어 갑니다. 그런 어느 전도 집회로 갔을 때, 그 집회와 상관이 없는 자매가, 볼 일이 있다고 가 보았더니, 이 지역에서 제일 맛있는 생고기 요리를 대접 해드리고 싶다고 그 집으로 데려가, 그 후 자매 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하루는 정말로 치유되어 위로받아 쉴 수 있었으며, 피로가 풀렸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그 날은 편히 쉴 수가 있었는지, 후에 생각해 보니, 그 자매는 대단히 고급 요리를 바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영적 상태로 있으며, 방향은 어디며, 예수님에게서 받은 이 목사의 사명이 뭔지, 왜 피곤하며, 무엇이 힘든지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자매였기 때문에, 그 날 목사도 위로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자매는 새삼스레 표현한 것도 아니고, 말로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목사가 대답하기 좋은 목사를 도울 수 있는, 그러한 이야기를 유도하면서, 목사가 정말로 편히 쉬고, 즐기고, 자유롭게 회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니 결과, 치유받고 돌아갈 수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예정이나, 신체의 상태를 모두 헤아려서, 그 자매가 강요하지 않으면서 섬길 수가 있었기에 그 목사가 평소와 다르게, 어디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위안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이, 정말로 그렇습니다. 다른 집에서는 편히 쉬지 못하셨다.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으실 때 다른 집에서는 안되었습니다. 왜? 아무도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쉴 수 있는 집은 돈을 쌓아, 좋은 침대나 고급 이불을 준비하여도 편히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쓰고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로 위안을 줄 수가 없다. 이 3 남매가, 왜 특별히 예수님에게서 사랑받았을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는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가는지, 누가 예루살렘에서 성공하는지, 아직도 예수님의 일을 이해못했다. 그렇지만, 이 3남매는,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예배하는 가족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에 있어서는 베개 베고 눕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이 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격하고 자기 열심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순종하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이해안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불편하며 일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도 지금도 같습니다. 이 자매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이 들었습니다.」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와 주세요.」 하지 않았다.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내 형제가 죽으면 곤란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이런 말은 안한다. 내가 했던 봉사나, 이만큼 애정을 가지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하지 않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 이런 협박을 안한다. 단지 한마디,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 들었습니다.」 그것만을 전합니다. 예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면 된다. 그 것이 최선이다, 하는 증거입니다.

이런 믿음을 3남매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도,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데, 라는 요구도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집에 머물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은 지금도 중요합니다. 거의 이런 크리스찬이 없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이 남매는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는 편지를 보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란 표현을 할 정도로 제자들도, 이 3남매를 사랑하고 있었다. 예수님만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전원이 인정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진실로 양심적인, 성품이 좋은 가족이었다. 예수님이 인정하는 가족은 결국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도 다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불리며, 「나의 친구」라고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그 뜻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의미다.

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1 세기말의 크리스찬에 있어서는, 인사말이었다. 크리스찬의 형제,자매 사이에서, 교회성도들끼리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지로, 우리 모두 인사를 보냅니다라고 할 때에 사용된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란 도대체 어떤 뜻입니까? 좋고 싫다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원한 사람들. 예수님이 속죄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애정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해진 사람들이라는 명칭으로 1 세기말에는 변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지금 병이 걸렸습니다.」이며, 예수님도 「나의 친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I love you」처럼 미국인이 하는 인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인해서 속죄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후에는 크리스찬끼리 쓰는 용어로 바뀌어갑니다.

그리고, 5절.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

예수님이 이 남매들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틀 머물었다고 써 있습니다.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면, 곧 바로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랑하고 있으면, 미운 사람보다 곧 바로 행동이 나오고, 사랑한다면, 낯선 타인보다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 생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체성과 주권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자기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움직이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요한 복음서가 일관해서 말하고 있다. 갈릴리에 있는 가나란 마을에서 혼인의 연회가 있을때도 그렇다. 어머니인 마리아가 「이 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물었을 때에, 「 내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차갑게 대답하셨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어머니가 부탁했어도 바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에, 물을 포도주로 바꿉니다.

또 형제들이 유월절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오를 때, 「당신은 이런 시골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서, 공식으로 인정받아라. 그러면, 더 편하게 박해받지 않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다. 공적으로 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으면, 가족도 더 편해지고, 우리도 제대로 인정한다.」라고 했을 때도, 「 나는 안 간다.」라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후 예수님 때에 갑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말했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친한 사람이건 가족이건, 사랑하는 사람이건 관계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 자신의 방법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십니다. 절대 사람의 부탁,사정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틀 더 가지 않았다.」 이것은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3 일이 지나면 시체는 썩어버린다. 이곳은 베다니에서 하루 거리이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사람을 보내는데, 1일 걸려, 그리고 더 2일 머물었으니, 합하여 3일이 지난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다니까지 갈 시간이, 또 1일. 결국 4일 걸립니다. 4일이면 시체가 완전히 썩을 시간이다. 그래서 마르다가, 이미 4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라고 대답했다. 즉, 통지를 전한 그 날에 나사로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면서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2일 머물고 계셨다. 완전히 썩을 때까지 예수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번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하지만 방금 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 곳으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왜,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는데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가야 됩니까?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하루중 낮이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그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그 사람 속에 빛이 없으므로 넘어진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위험해요, 가지맙시다. 하고 제자들이 말려도,

「아니, 나는 간다. 왜냐하면 하루는, 낮이 12시간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생각은, 하루는 해돋이부터 해가 지기까지, 밝은 시간을 하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1일을 12 분으로 나누어, 12시간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겨울 시간과 여름 시간이 달라도 12시간이라고 부른다. 해돋이에서 일몰까지 날이 밝을 때를 하루라고 하며, 그것을 12 분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의 생각이다. 그래서 낮이, 12시간 되지 않느냐고 예수님이 말합니다. 빛이 있을 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내 결정된 시간에 죽기 때문에, 아직 내 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 내 시간이 되지 않으면, 나는 죽음을 당하지 않다.」예수님 자신이 죽으실 시간도 스스로 결정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없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지 않을까 무서워하지만, 예수님은 내 시간에 나는 죽기 때문에, 지금은 그 시간이 아니다. 아직 낮이며 12시간 남았다. 예루살렘으로 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또 다릅니다.

9장 4, 5절~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여기서도, 낮과 밤이 있고,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어진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낮이 12시간 밖에 없기 때문에, 서둘러 일하여라. 여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밤이 되기 전에, 밝은 12시간 사이에 계속 일을 해라.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라고 말합니다만 예수님이 말하는 원리는 빛은 예수만이다, 밤이 오면 아무도 일 못하게 된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빛이 없기 때문에 너희는 어둡다는 뜻이다. 현대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지금은 바쁘다. 시간이 없어서 저것을 할 수 없다. 이것을 할 수 없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기도 못하는 것도, 성경 읽지 못하는 것도, 공부 못하는 것도, 원인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현대인을 보고, 경고합니다. 낮이 12시간 있다. 이것은 평등하게 있다. 누구나 일할 수 있는 낮 12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없습니까? 우선순위가 틀린 거다. 예수님은 시간이 없지 않다. 당신에 없는 것은 진정한 빛이다. 라고 하신다.

이 바쁘다는 말은 한자로, 마음을 잃다. 라고 쓴다. 예수님이 말하는 대로입니다. 마음이 어두우니까, 마음에 빛이 없기 때문에, 결국 12시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니, 예수님께서 계시면,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이유는, 마음에 빛이 없다. 마음에 예수님이 없다. 마음이 죽어 있고,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무엇을 해도 마지막은 다 실패한다. 아무리 바쁘게 일해도, 성령의 열매가 없고 성화가 없습니다. 속이 변하지 않습니다. 왜? 빛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죽어 있다. 그리고 생각은 어둡다. 그렇지만 착각 하면 안 된다. 누구나 12시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변명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12시간 주지 않았는가. 당신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었던 이유도 아니고, 당신에 없었던 것은, 빛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죽어 있기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안계시면, 빛이 없고 진리가 없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나 구원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일해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물며 절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낮의 12시간 주었다. 당신이 우선 순위를 잘못해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고, 자신을 우선시켜, 자기를 위한 시간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것은 오히려 이 당시 사람보다, 우리 현대 사람에게 준 충고이다. 그 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겠다고 하셨다. 그 때 제자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않습니다. 「자고 있다면, 그렇네요, 재워 둡시다. 2일간 더 환자니까 누어 있으면 낫게 되지요.」 이런 생각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네요, 그럼 예루살렘으로 갑시다. 그 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죽었다.」 이해하지 않으니까 바로 정정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틀 더 기다렸다.」 말씀하십니다.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우리도 순교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그 정도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벌써 지명 수배되었다. 그 예수님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도마는 「예루살렘에 가서, 우리도 죽자.」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2일 더 머물러 베다니까지의 하루의 도정을 합하면, 나사로가 죽은 뒤에 4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믿기 위해서다.」 라고, 예수님은 여기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나사로가 죽고, 다시 살아나고 모두가 기뻐하며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일은 있었고, 물 위를 걸으시며, 5천명을 빵을 먹이시며, 큰 기적을 몇번이나 행하셨다. 그 때도 모두 기뻐하며 흥분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너희들이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4일간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을 일으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시켜 믿게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믿도록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간 이 후 곧 산헤드린을 열어 유대인들의 회의가 시작됩니다. 나사로가 죽고, 다시 살아나면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 입니다. 유대교 간부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논의합니다. 이 사람은 많은 표적을 행하고 점점 그에게 사람이 모여가는데, 도대체 우리는 계속 내버려 둡니까? 이때, 완전한 사형 선고가 내린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다렸습니다. 기적을 실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형이 결정되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게하고 또 살려서 십자가를 준비하십니다. 사랑하니까, 병을 치료해 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형 선고 받기 위해서, 이 기적을 일부러 표시로 행하시고, 그것은 너희들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십니다. 우리는 정말로 둔한 존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않다.

여기서, 왜 3남매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이 가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집을 가셨는지? 3명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편히 쉬게 할 수 있었던 가족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 하는 가족입니다. 마리아는 매장의 준비를 하며, 이 베다니에서의 6일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제일 어려운 시간을, 이 집에서 지내셨다. 제자의 집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예배하는 가족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며, 크리스찬의 모습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고 싶은 일만을 하십니다. 자신의 시간에, 자신의 방법으로, 움직이신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란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사정은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의 길을 안가셨으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 마음을 이해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Yokohama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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