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1-11절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써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나를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가 죽고 살아난 그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이제 지명 수배자입니다. 그리고 현상금이 걸렸다. 삼인 광고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에브라임이란 예루살렘에서 북20km 떠난 이 작은, 정말로 시골에 계셨지만, 유월절 6일전에 대담하게도,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오셔서 그 모습을 공공연히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유월절의 축제는, 유대인의 설날 14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해는 목요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6일전이라고 하면, 토요일 9일이 맞다. 마치 유대인들에 있어서는,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안식일의 연회가 한창이다. 그런 성대하게 열린 곳으로 예수님은 공으로 얼굴을 나타내시고, 베다니 같은 큰 도시에, 예수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함께 있었다. 그 잔치는 예수를 위해서 벌이며 그 만찬을 준비해서 마르다가 일하고 있다.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 따라서 마르다는 지금 음식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서 바쁘다. 그 이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마르다가 열심히 섬기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서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으므로, 손님인 예수님에게 불평을 했다. 「마리아에게도 일 하도록 말해 주십시오.」 라고 분개하고 화내었다. 예수님은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말려서는 안 된다.」 하는 이야기 뒤, 지금 마르다는 불평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접대 하고 있습니다. 그 연회 속에 죽고 살아난 나사로도 그 객석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라는 표현을 보면, 여기는 나사로의 집이 아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감사해서 예수님을 대접하고 있다면, 그러한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는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나사로도 예수님과 함께 손님의 한 사람으로써, 또한 마르다는 자신의 집이 아니지만, 틀림 없이 섬기는 은사가 있어서, 여기서도 또 음식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즉 나사로의 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마리아는 대단히 비싼 나드 향유 약 300g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그 향유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이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유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여기에 대단히 고급인 나드 향유라고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향유라 하면 몰약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향유는 몰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드 향유란 명칭으로 부르는 나드라하면, 히말라야 산맥에 나무에서만 추출한다. 그러니 몰약이 아닌 좋은 향기가 난다는 표현이며, 게다가 순수한 향유라고 하는 의미는, 학자들이 지금도 모른다고 한다. 무엇을 순수하다고 하는지, 그것이 액체나 분말이나 하는 그런 차이를 말하는지, 혹은 순수한 나드 향유라고 말하는 그냥 이름인지 아직도 모른다고 하지만, 어쨌든 귀하고, 그리고 300g 이나 하는 양이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 향수를 쓸 작은 병이 아니라, 더 많은 양이 들어 있는, 큰 병을 가지고, 여기서 300g, 이라 써있지만 정말은 300g이상이다. 그 300몇십그램을 가져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서,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이야기는, 마태도 마가, 누가도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 일치하지 않다. 마태, 마가 복음서에 의하면, 유월절 명절 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난 상당히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이야기로 되어있어, 거기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며, 게다가 그 여인의 이름은 덮어 놓고 있다. 누가에 있어서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유월절 명절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그 이전의 갈릴리에서, 죄가 많은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흐르며, 머리카락으로 젖은 발을 닦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학자들은 이것이 같은 이야기인지, 같은 한 여인에게 의한 사건이었던지, 학자들의 의견이 나누어진다. 여기는 정말 어렵다고 사카키바라 선생님도 말하신다. 왜냐하면 먼저,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한 쪽은 발에 붓고, 한 쪽은 머리에 붓고 있다. 특히 누가에 있어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선교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이란 아무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그 죄가 많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번 요한에 있어서는,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고, 그리고 마태, 마가에서는 이름도 없는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학자들의 여러 의견 중에는, 요한 복음서는 역사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인상을 학자들이 가지고 있어서, 여러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 씌어진 것이 아닐까? 기억 차이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완전히 다른 여인이며, 별도의 사건이 아니었던가, 요한은 마태나 마가의 사건과 또 다른 정확히 기록한 누가의 사건을 섞어서 쓴 것이다, 란 의견이 있다. 학자들은 이 여인은 한 사람이었는지, 두 사람이었는지, 혹은 사건이 하나이었던지, 두 개의 사건이었던지, 이야기가 나누어지는 가운데, 아마 여인은2명 있었을 것이라 하는 것이 대강의 학자들의 예상으로, 누가가 쓴 갈릴리의 전도 중에 나온 죄가 많은 여인은 다른 여인이며 다른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마태, 마가, 요한은 같은 사건일 것이다. 그 같은 사건이라 생각되는 공통점은, 먼저 300데나리온. 300g 팔면 값이 300데나리온에 해당 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리고 이 장소가,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의 집이었다고, 마태나 마가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나사로가 손님으로서 있었다는 일치하는 사실이다. 여기가 아마 문둥병 시몬의 집이며, 안식일의 음식을 드셔서 예수님과 나사로, 그리고 12 제자는 물론, 다른 몇 명도 불려서, 매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곳에서 일 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 마르다는 이번은 사람이 많아도 예수님에게 이제 말대꾸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제 나사로가 죽고 살아날 만큼의, 기적을 경험 하고, 예수님에게 진실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유다라고 이름을 밝히지만, 마태나 마가는 여자의 이름도 덮어 있다. 여기서 불평을 하는 남자의 이름도 명백하게 안 한다. 요한만이 가룟•유다라고 숨기지 않고 이름을 내어 비난한 것은, 그 알리는 목적이 있었다. 마태나 마가 복음서에서는, 이 사건의 뒤에 바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선생님을 팔면 얼마 주냐, 고 은 30개를 받은 사건이, 이 다음에 씌어져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유다가 마리아에 화 낸 남자이며, 요한과 마태와 마가는 같은 사건, 같은 한 여인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그 죄가 많은 여자, 누가에 나오는 여인은, 딴사람일 것이라 우리는 이해하고, 이 요한서를 읽으면 된다. 왜냐하면 여기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300데나리온으로 팔 수 있다고 유다는 불평을 했다. 그 유다는, 요한이 설명하기에 회계를 맡고 있어서, 돈 계산을 하던 사람이니, 당연 머리도 좋고, 항상 계산도 빈틈없이 했을 것이니, 그 향유를 곧 300데나리온이라 알아 맞힐 수 있었다.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왜 불평을 했는가 하면,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종종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던 도둑이었기에, 그 적자를 메우려 작정 중에, 지금 사치스럽게도 300데나리온이나 마리아가 눈앞에서 전부 쓴 것을 보고, 격렬하게 화 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마태, 마가 복음서에서는, 은 30개를 받으러 가는데 유다는 예수님의 대한 정치적 불만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령 자신이 원한 정치적 운동을 예수님이 안 해준 불만은 있었다 한들, 은 30개 받는 것을 보면, 자기가 쓰던 돈주머니의 구멍을 메우고 싶어서, 마리아에게 욕 했을 것이다. 이 300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의 댓가가 1데나리온을 주기 때문에, 하루 노동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있는데, 노동자에 하루 수입이 1데나리온이었다면, 여기서 300데나리온은 1년분의 노동자의 수입이다. 1년이 365일이다, 그 중 50일이상이 안식일로 일을 쉼으로, 1년분의 노동자의 수입으로 계산 된다. 상당의 금액이다. 그 값비싼 향유를 마리아가 지금, 물쓰듯 쓰고 있다. 마르다는 지금 겸손히 일 하며 이제 불평을 하지 않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지금, 순수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집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했다고 있지만, 마태나 마가는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발에 부었기에, 역시 딴사람인가? 이 사건이, 요한은 기억이 혼란해져, 역사적으로는 가장 증거가 안 되는 서적이라는 의견이 있는 유래지만, 일본 성경의 번역은 마가는 석재의 병을 깨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머리로 병을 깨뜨리고, 그 파편과 함께 기름이 쏟아졌다고 하면 너무나 이상하다. 요한이 『발에 부었다』 하는 말로, 사건이 따로이며, 기억이 혼란하고 있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정말로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복음서를 쓰고, 예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요한이, 애매하게 적당한 일을 했을까요? 요한이야말로, 매우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가 가장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사카키바라 선생님은 말한다. 그리고, 마태, 마가 복음서에서는, 이 여자가 한 것을 호되게 나무란 유다를 예수님이 질책합니다. 「이 여자를 괴롭히지 마라.」 이 여자가 한 것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라고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다. 그러나 요한만은 그 칭찬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대신 무슨 표현을 했냐 하면,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했다.』 마리아가 그 향유를 밟아서, 돌아다녀서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퍼졌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러나 유대인의 비유에서, 집안에 향유가 가득했다, 침실로부터 식당에 이르기까지 향유가 가득해졌다는 뜻은, 그 좋은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다고 하는 의미로,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그런 비유가 있었다. 결국 요한도 추상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마태•마가는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다. 요한도 이 여인이 한 좋은 일이 전해질 것이라, 하는 같은 내용을 쓰고 있다. 그래서 결과 이 사건은 같은 하나의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가치가 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마리아는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향유를 준비 해 둔 것이다. ∼
마태, 마가는 장례 준비를 위해서,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고 표현하고, 요한은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고, 씌어져 있습니다.
여기도, 신학자들이 대단히 옥신각신한다. 이 『장례 치를 날을 위해서 준비했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으므로, 이 300데나리온을 전부 쓴 것이 아니라, 실재로 사형이 되는 날까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 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것은 틀린것이다. 여기서 다 썼지만, 십자가의 그 날에, 그것을 마음에 새겨 기억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며, 혹은 장례 치를 날을 위해서 준비 해 두었습니까? 아니요, 오늘 모두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문문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일본 새개역 성경 제2판에 의하면, 『장례 치를 날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
확실히 장례 치를 날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미래형이지만, 이 표현이 가장 맞다고 생각된다. 십자가에 달릴 사형의 날까지 간직해 둔다든지, 그 날에 그것을 마음에 새겨 둔다든지, 그렇다면 이날,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300g이상의, 이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리아의 행위가, 그냥 상징의 일부분처럼, 모자람이 있게 번역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장례 치를 준비라고 번역이 되면 그것도 틀린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요한서는 『장례 치를 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은 같은 단어가 사용되어 있어도, 마태나 마가에서는 『장례 치를 준비』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날이 장례 치를 날이었다고 하는 해석이 가장 맞다. 이날이 장례 치를 날이니, 그 여자는 그렇게 했다. 하는 표현이 가장 맞습니다. 그러니까 장례 치를 준비를 했다고 하면 틀렸다. 왜냐하면 발에 붓고, 머리에 부었다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는 내 몸에 부었다.』 고 하셨다. 요한이 발에 부었다고 하는 것은, 온 몸에 부었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서는 머리에 부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손님이 찾아와, 귀중한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은 보통 인사로, 일반 대접이었던 것이다. 발에 붓고 온 몸에 붓는다고 하는 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이 왜 굳이 발이었던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장례 치를 날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 말 대로, 죽은 사람의 시체에 장식한다는 것이다. 장례식 때에 전신에 향유를 붓는다는 유대인의 습관, 그 당시의 미라 만들기이었다. 어쨌든 이집트에서는 물론이지만, 여기 이스라엘에서도, 시체에 향유, 혹은 몰약으로 장식하고 깨끗하게 한 후, 하얀 천으로 감는 것이 유대인의 장례식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시체를 내려 장식할 때도, 똑같이 예수님의 몸에 몰약을 칠하고, 천으로 감고, 무덤 속에 가둔 것처럼 여기서도 같은 표현을 요한은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병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는 표현도 향유를 전부 사용했다는 뜻이다. 마태, 마가도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전부 부었다면 머리만일 리가 없다. 온 몸에 붓고 발까지 붓게 된다. 왜냐하면 300몇십그램도 있기에 안개로 내뿜은 정도가 아닐 것이다. 결국 전신에 향유가 부어졌다는 의미다. 특히 여기는 연회의 장소이다. 유대인은 식사할 때, 의자에 앉거나, 밑바닥에 앉거나 하지 않다. 엎드려 누워 먹는다. 팔로 머리를 떠받치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습관이다. 즉 처음부터 발을 내던지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에게 감사를 하고, 머리부터 발까지 향유를 부었다. 실제로 틀림 없이 장례식입니다. 이 매장하는 날. 실제적으로 마리아는 대단한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나를 매장하기 위해서, 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모두 붓고,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이 향유를 준비해 둔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 장례식을 올리고 있다. 왜일까? 예수님은 아직 살아 있어요. 과학적으로 따지면 이상하다. 현실은 그 며칠 후, 십자가로 죽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 장례식의 날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왜 지금 나사로를 옆에 두고 계시는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나사로가, 오늘 예수님과 같은 객석에 있고, 그리고 모두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를 보려고 와 있는 것인지. 실지로 나사로를 보고 싶은 사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4일도 지나서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이 널리 퍼졌으므로, 처음부터 나사로가 함께 있었다고 말하며, 마지막도 나사로도 같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최초와 최후 끝까지 일관해서 이 나사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사건이 많은 사람에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 물려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믿기 때문에 나사로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날로,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매장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 죽지 않고 계신다. 예수님에 있어서 장례식의 날은 죽는 날이 아닙니다. 죽음과 장사는, 부활의 입구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처음부터 최후까지 나사로를 옆에 두고, 그것을 믿는 성도는 죽어도 살 것이다, 하는 말씀을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십자가에 걸려 죽지만,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그 장례 칠 날에 향유를 붓고 죽음의 장식을 하고, 지금 매장하는 날이면서도, 나는 살아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처음부터 최후까지 나사로가 같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은 내 장사 준비를 한 것이다.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사고를 옆에 두고, 나사로를 상징적으로, 죽음에서 살려 그것을 믿은 많은 사람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고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매장하기 위한 장례식은 끝났지만,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준비를 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그것을 행한 사람입니다. 이 3남매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3명이었다. 특히 나사로가 그렇다.
그리고, 마르다는 항상 예수님의 몸 건강을 챙기며, 예수님의 생활에 신경을 써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식의 날, 장사를 한 사람이다. 이 3명이 마지막 6일간을 같이 지냈다. 그리고 이 마리아가 정말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지혜로운 여성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아래서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을 때도, 모두가 불평을 했어요. 제 마음대로 일 안 하고, 남자와 같이 혼자 예수님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마르다가 아니어도, 화 낼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마리아는 상관 없다. 지금 예수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가장 중요했습니다. 무엇을 예수님이 가르치려 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다. 이런 300데나리온이나 비싼 금액, 가난한 사람, 300명이상도 도울 수 있는데, 당신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고, 격렬하게 화 내는 속에서도, 또한 예수님의 비위에 맞추는 행위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런 낭비하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다고, 유다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마리아는 그런 것은 관계 없다. 이 마리아는 욕심이 많고, 둔하고 무지해서 이런 일을 했었는가? 아니지요. 제대로 보고 알고 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중요한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 때마다, 그 속에서, 중요한 하나를 알고 있었다. 그 때, 그 때,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 만약, 예수님이 바란다면, 아끼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의 신앙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유다적인 크리스천은 가득해요. 여기서도, 우리는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이 가룟•유다가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다만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인가? 지금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경고가 있는가?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을 못본다.
유다와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하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혼자 짊어 가시고, 혼자 죽음을 향해서, 그리고 부활하시려, 오늘 장례 치를 날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 속에서, 마리아만이 장사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한테 비난 받아도, 마리아는 그 하나를 해 가는 것이다. 마리아는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정한 그 하나, 이 하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해낸다. 그리고, 그 하나는 많지 않다. 하나라고 정하고, 하나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전 재산, 전력, 온 마음을 다해 할 일이다. 적당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렇다. 「그런 틈이 있다면, 이것 하고 저것 하세요. 」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틀리지 않다. 이웃 사랑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훈계입니다. 그것을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회는 1번밖에 없다. 그 기회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다. 이 복음을 소흘히 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이것저것의 봉사를 했다고, 그것은 가장 중요한 하나가 아니다. 순위가 틀리다. 이 마리아는 그 하나를 정말로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 없이 가난한 사람을 돕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돕고, 환자를 문안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의 생활의 대부분이 이렇다는 것이다.
왜, 여기서 나사로를 살려 예수님의 옆에 두고, 예수님 자신이 그 날을 장례 치를 날이라 하고 미라 만들기와 같은 향유를 가지고 장식하셨을까? 이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없이는, 아무것도 소용없다. 구원도 천국도 없습니다. 모두 지옥행군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중요한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싫어한다.
유다적인 생각밖에 가지지 않습니다. 300데나리온 있으면, 300명이상 구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거기에 예수님은 안 계신다.
기독교는 박애주의가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 이 중요한 하나를 뺀 기도를 우리는 해서는 안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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