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6장5-16절


∼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 ∼

오늘 이 본문에서는, 이미 몇 번 예수님이, 「다른 보혜사가 오신다.」라고 성령님이 오실 것을 말씀 하셨지만, 이번은 그 성령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구체적인 설명이 여기에서 들어간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이야기한, 크리스천이 어떤 길을 가는가,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 이 세상은 당신을 미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일인자인 내가, 크리스천의 원형인 내가, 십자가에 걸려 죽을 것이고, 이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이 세상이 나를 박해하면,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자는, 당연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이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의기양양하게 예수님과 함께 가자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 16장부터는, 크리스천이 누구인지 밝혀져 가는 것이다. 제일 높은 자리를 원하고, 각료가 되고 싶고, 예수님이 권위를 가졌을 때, 오른쪽과 왼쪽으로 오르게 해 달라고 빌며,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우리들도 반드시 따라가겠다고 말하던 제자들. 그러나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 하는 이야기는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러나 너희 중에서 나에게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

무엇이 슬픈가? 예수님이 지금, 떠나 간다고 하셨다. 이 때 그들이 왜 슬프냐고 하면, 방금 말한, 구박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실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왜냐하면 내가 먼저 받으니까 아직 신랑이 있을 동안은, 너희는 안심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신랑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박해를 예수 한 사람만이 받고 있었지, 제자들은 그 핍박을 직접적으로는 안받고 있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다. 그것은 제일인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거기까지의 박해는 아직 없기에 그다지 공포도 없으므로 의기양양 목숨을 걸어서 주님과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다. 주님이여, 이제부터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고 힘차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전부 버려서 당신을 따라왔다. 대단히 자부심이 넘쳐서 흥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나와 같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하고 듣는 순간에 이제 슬픔과 낙담이 가득합니다. 맥이 빠지고 의기소침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제 다시는 너희 가운데 내가 어디로 가는 지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깨닫고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박해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 핍박은 싫었던 것이다. 높은 위치는 가고 싶다. 각료는 되고 싶다. 예수님과 함께 가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를 따르지 못한다. 자기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나의 길은 가지 못한다. 라고 한 순간, 제자들은 이제 아무 말 못하게 되었다. 따라간다는, 아까의 기세는 없다.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해지고 있다. 이것이 지금 제자들의 상태입니다. 어제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긴 그때부터, 하루도 지나지 않고, 아직 설교는 계속되며 아직도 최후의 만찬의 날이다. 그 설교 중에 조금씩 제자들은 박해와 성전에서 추방되는 일, 혹은 생명의 위기마저도 직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예수님의 길이 이제 싫어졌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각료가 되고 싶었던, 저 기분은 이제 벌써 사라져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관한 문제가 닥쳐왔을 때, 예수님을 걱정할 여유는 없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추호도 없다. 자기밖에 생각 못한다. 눈앞에 공포만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자기 안전밖에 없다. 자기 목숨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부터 십자가에 걸려서 죽어야 할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동정심은 이제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나, 감사는 없고 이제 자신의 감정적인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에게 묻는 자가 없다는 상태이다.

하지만 몇 분전까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습니다. 최후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에 있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문제가,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고난이 다가온 순간에는 이제 믿음이 사라졌다. 예수님의 길보다 자기들의 슬픔이 가득 하는 것을, 벌써 예수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셔, 지금 제자들에게 엄격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깨달았기 때문에 하신 말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미 자기밖에 생각 못한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참 모습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

내가 이대로 여기 있으면, 보혜사가 오지 않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성령이 오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다. 그것은 너희에게 유익이다. 그럼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알기 위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활해서 하늘로 돌아가셔야 한다. 그런 후로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순서입니다. 성령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 구약 때에도 성령님이 일하셨다. 성령이 안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것은, 『보혜사』입니다. 『다른 보혜사』가 오기 위해서는, 내가 일단 천국으로 돌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곳을 떠나지 않으면, 너희에게 보혜사가 오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계신다. 그럼 예수님께서 계시는 동안에 왜 보혜사가 같이 있을 수 없는가? 보혜사와 예수님이 동시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은 채로 임재 하시면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세계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됩니다.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그 시대의 사람만이 예수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육체적인 임재는 사람 눈에서 한번 보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므로 천국의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리고 보혜사를 보내신다. 그것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그 1000년후도 2000년후도,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모든 나라 사람에게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떠나 가지 않으면, 너희에게 보혜사가 절대로 오지 않다. 지금까지 성령이 이 땅에 안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들에게 보혜사가 올 수 없다. 성령이 오면, 너희에게는 유익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있어서 대단하게 중요했습니다. 내가 일단 너희 눈에는 보이지 않아지지만, 만일 눈으로 계속 보게 되면, 가령 보혜사가 오셔도,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해도, 현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계시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 온갖 수단을 다해서도, 정말로 헤엄쳐서도 갈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탐욕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빌고 싶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으로 일단 모양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고 계십니다.」이라고 로마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시고 우리를 위하여 보혜사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확고한 보증입니다. 너희들에 있어서, 지금 내가 떠나는 것이 훨씬 유익이라고 말하신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 한번 다시 돌아 와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지금 보이는 이상에 너희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얼마 진리를 이야기 해도, 아무 것도 이해 못했던 사람들이, 성령이 들어오시면,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을 때, 3000명이 구원받아, 또 5000명이 구원되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야기 하셔도 깨달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진리를 알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이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늘에 들어가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한 유익이 생긴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유익 때문에 지금 내가 떠나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다.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의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

일본 성경은 책망이 아니라, 『인정시킨다』라고 번역한다. 이 뜻은 알린다는 의미이지만,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죄를 책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죄를 엄격하게 책망하고, 의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죄가 표면화 되고 알려진다. 인정시킬 것이다. 노출되어 이제 숨기지 못하게 되다. 이것을 보혜사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보혜사가 그 일을 하신다. 반드시 죄는 드러나고 책망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보혜사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시냐 하면, 그것은 『죄에 대하여』 이 죄에 대해서, 먼저 성령님은 너희 안에서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책망 한다고 말씀 하셨다.

∼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임을 알릴 것이다. ∼

죄에 대해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지 않았다는 말은, 몰랐다, 들은 적이 없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는 것을 거절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먼저 무엇을 가르치며, 명백하게 책망하시는가? 「너희는 들어서도 믿는 것을 거절한 것이 아닌가? 」 그 죄를 성령님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신다. 반드시 당신을 책망하게 된다. 이것이 보헤사가 하시는 일이다.

∼ 또, 의에 대해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으로써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이 의에 대한 개념은, 로이드·죤즈선생님도, 「의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의에 대해서는 크리스천이 여러 생각을 하고 있고, 모두가 각각, 의에 대해서 동일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목사는 의를, 죄가 없는 상태.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틀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생각할 때, 크리스천이 보통 생각하는 의가, 거룩하다, 크리스천의 경건한 생활. 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그것은 이 다음에 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조리가 서지 않게 된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이 경건한 생활, 성화나 거룩하다는 뜻이면 그 다음 말은 이상합니다. 맞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의 생활 스타일을 말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천의 종교적 의식이나 규정이나, 거룩함을 말하지 않고 있다. 성령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정확하게 인도하고, 선한 일을 시킨다, 그것을 가르치는 의가 아닙니다. 그런 뜻이라면「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의에 대해서 성령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버지께로 간다고는, 어떠한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반드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육을 입으실 때, 우리의 의가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상태가 아니다. 곧 우리는 사람중심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의에 대해서 성령이 가르칠 때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성령은 가르치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르치는 의입니다. 우리는 항상 착각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멋대로 해석해서, 내 중심으로, 마치 점을 보듯이 다루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에 준 예언 같이 착각한다.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이 의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한다.

사도행전 연고 5장 30-32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높이 올리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지도자와 구세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성령 역시 그렇습니다. 」 ∼

베드로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때 예루살렘의 주민이 예수님을 상기할 때에, 그들은 실제로 목격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아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걸려 죽은 죄수이며 저주받은 사람이다. 반역자,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형은 저주받은 형입니다.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 현장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에 매달아 죽은 저주받은 자.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이란 인상을 가져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일어서서 성령님도 증인이 되고, 증거를 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죄인이 아니다. 회개를 통하여 죄를 사해주고, 구세주로서 하나님 오른편에 오르신 분. 모든 주권이 그 분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살아나신 분. 우리의 의로 되신 예수님에게 아버지께서 전권을 주셨다. 성령님도 이분을 증명하시고, 그리고 베드로도 증명하고, 사도들도 증명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토대로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한다. 사도들은 무엇을 한 사람입니까? 복음서를 써서, 성경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것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죽어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그리고 전권을 가지신 분.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혜사가 오셨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2장 14-15

∼ "그래서" 자녀들은 모두 살과 피를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겪는 것과 똑 같은 것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

심판에 대해서 설명한다. 지금까지 죽음에서 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은 죄다. 그러므로 마귀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노예가 되었다. 마귀와 죽음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해결 못했기 때문이다. 그 죄는 반드시 죽음이란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겨낸 사람도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사로잡혀, 사탄의 손바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무엇을 한 분인가? 죽음에서 살아나고, 그 의가 죽음의 권세를 멸망시켰습니다. 죽음의 효력이 잃어버린 것이다. 죄가 우리를 고소할 수 없으면, 죽음은 효력이 없어진다. 우리의 죄가 고발당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죽음이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도 사람을 지배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살아난 일은 결국 무엇입니까? 죽음을 타파해버렸으므로,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고 그 결과 마귀의 지배가, 우리를 노예로 얽매는 것을 이제 허락되지 않게 한다. 이것이 심판에 대해서, 보혜사가 가르친다는 것이다.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성령이 가르치는 것은 이렇습니다. 두 번 다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귀가 지배할 수 없는 상대. 왜? 마귀는 죽음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죄가 있는 상태의 경우뿐이다. 죄가 사해져서 깨끗해지면, 죄가 고소하는 죽음이 힘을 없애버리므로, 마귀는 절대로 지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마귀가 심판된 것은, 예수님이 죽음의 능력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진리로 할 때에, 그럼 마귀가 힘을 완전히 잃었던가? 라고 말하면 아니다. 여전히 마귀는 일하고 있고, 지금도 사탄은 이 세상의 왕이다.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마귀가 거짓으로 만들어 낸 곳이다. 마귀는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권위를 잃은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마귀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믿는 성도는 마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예수그리스도가 행하셨다. 사람이 싸워서 승리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마귀를 쫓아 낸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인간이 마귀에 이긴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승리했다고 말한다. 죽어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스스로 생명을 얻으신 분은, 예수님만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죽음을 멸망시켰습니다. 성령은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오셨다. 그것을 우리는 뭔가 예수님이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선물을 주신 것처럼 생각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협력자이라고, 멋대로 착각하기 때문에, 성경이 자기 중심으로 해석되어 간다.

성령님이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가르친 후,

∼내게는 아직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들은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될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이번에는 보혜사를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진리의 성령이 오면, 반드시 너희는 앞으로 일어나려 하는 일을 알게 된다. 앞으로 될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는, 신학자들 가운데서 또 의견이 나누어진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어떤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재림에 대해서 성령이 가르칠 것이다. 라고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 드디어 일어날 일을 알리는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그 전에 하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린 후에 성령님이 재림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최후의 만찬의 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지금은 최후의 만찬이 아직 계속되어 있고,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시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즉 예수님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는 것, 그리고 승천하는 것. 그것을 진리의 성령은 알려 주신다고 말하며, 또한 그것은 예수님을 가르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령운동 안에는, 미래를 예언하거나, 미래를 알아 맞히거나, 그러한 점을 보듯이 성령이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성격을 알아 맞히고, 과거에 일어난 것을 알아 맞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해서 증명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진리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다고 말하신다. 드디어 일어나는 일,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해서 「 십자가에 걸려 죽으신 예수 앞에서 회개하라. 여러분들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예수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하여 오신 것을.

그리고 이 성령을 보낸다는 구절에서 신학적으로 논쟁이 일어난다. 「하늘의 아버지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씀이 있고, 이번에는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낸다.」라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

∼진리의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신다고 말할 것이다. ∼

여기서 말씀 하시는, 「내가 이번에는 성령을 보낸다.」 이전에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가 성령을 보낸다고 하고, 여기서는 예수님이 보낸다고 하는 것은, 의견이 딱 절반으로 지금도 나누어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것은, 출처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시나 틀리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나 틀리지 않다.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하고 예수님이 지금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순번이나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하나의 본질의 하나님. 그러므로 아버지가 보냈다고 해도, 예수가 보냈다고 해도, 틀림이 아닙니다. 그러나 로이드·죤즈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가 보낸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걸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의 능력을 주신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하셨다.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에 자리잡았을 때에는, 전권이 예수에게 가는 것입니다. 원래 전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전권이 예수에게로 간다고 하신다. 이제 육체를 십자가 위에서 버리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 완전한 분이, 보헤사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이 인도한다는 말은, 희랍어로 『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이며, 길이며, 생명이다.」 말하셨다. 성령님도 예수님이 진리이며, 길이며, 생명이며, 그리고 의롭다고 가르칩니다. 하늘과 땅의 길을 열며, 하나님과 구원받은 성도들을 화해시켜서 생명 되신 분. 성경도 성령님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인간이 내일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점 보는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알려주신다. 이 진리를 안 것이 인간의 최대의 행복입니다.

Jesus Christ Glory Church

イエスは言われた。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いのちです。 わたし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す。 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 決して死ぬことがありません。 このことを信じますか。」 ヨハネ11章25,2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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